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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가는 길 - 이운진

갑사 가는 길 - 이운진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는다면 그래서 한 자리에 오래 서 있어야 한다면 거기, 서 있고 싶네 일주문 넘어가는 바람처럼 풍경소리에 걸음 멈추고 그곳에서 길을 잃고 싶네 산그늘 물소리 깊어져서 늙고 오래된 나무 꽃이 지고 꽃 피운 흔적도 지고 나면 말(言)까지 다 지우는 마음처럼 수만 개의 내 꿈들 떨구어 내는 일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저, 먼 길 끝나지 않았으면 *시집,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문학의전당 고드름 - 이운진 눈물이 만들어지면 그 슬픔은 이미 장식된 것이다 다, 다 반짝인 것이다 *自序 10년을 세워도 허공 속이다. 제겨디딜 한 뼘 바닥도 없는 곳! 하지만 이 위태로움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한줄 詩 2018.02.08

아버지를 숨기다 - 김점용

아버지를 숨기다 - 김점용 -꿈 71 산소통을 메고 사람들과 잠수를 한다 지하 물속에 납골당이 있다 세 사람은 유골을 여기저기 옮긴다 내가 유골을 꺼내자 플루트를 부는 연주자의 해골이 나오고 생전의 업적이 모자이크처럼 찍혀 있다 분명히 내가 아는 사람인데 기억이 안 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해골 숨길 데를 찾는다 완전히 까발려지는 인생이 없듯 완전히 봉인되는 인생도 없다 아버지도 그럴 것이다 무덤만큼 뚜렷한 징표가 있을까 봉분 지주를 잡고 아버지를 묻을 때 힘주어 다졌다 선산의 솔이파리들이 바늘처럼 반짝였다 장례를 다 치르고 어머니는 가장 많이 울 줄 알았던 내가 눈물 한 방울 안 흘린다며 서운해하셨다 *시집,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문학과지성 아버지를 바꾸고 싶어하다 - 김점용 ―꿈..

한줄 詩 2018.02.08

못 만나는 이별 - 김이하

못 만나는 이별 - 김이하 이제 가면 못 만날 거네 저물지 않는 사람의 들판 가득 낮달이 떠서 저물도록 농투사니 그림자 산 사람 등을 토닥거리고 사람의 집들 한 오라기 연기로 꿈적이고 땀내 비린 우리네 사는 아픔 거뭇거뭇 뒷산 장군 바위로 눕고 소식 없는 그대 생각 무장 얼크러져 아픈 등허리 뒤채네, 이 사람아 그대 간다면 가라 하였지만 나 몰라라 간다면 떠나라 하였지만 우린 이제 못 만날 거네 피고 지고 피고 지는 보리꽃 지고 낮달이 떠서 저물도록 내 그림자 넘실넘실 휘황한 사랑의 날은 저물어 어슴푸레한 기억 뒷산 장군 바위 아래 눕고 못 만날 거네, 이 사람아 이냥 가 버리면 우리 이 세상 시퍼런 5월 아니면 다시는 못 만날 거네 *시집, 내 가슴에서 날아간 UFO, 청파사 항문 외과에서 멈춘 歸路 ..

한줄 詩 2018.02.08

원 포인트 릴리프 - 여태천

원 포인트 릴리프 - 여태천 투수는 조심스럽게 볼을 던졌다. 전대미문의 구질을 구사한다는 진지한 표정으로. 스트리이크를 던지지 못한 저 투수의 볼과 볼의 궤적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핀치히터의 풀스윙. 가운뎃손가락을 높이 들고 오늘 처음 만나 악수를 나눈 당신과 나는 편향적인 사람. 비밀을 알아낸 자의 표정으로 왼손 투수는 다시 볼을 던지고 저 볼은 어디에 가닿을 것인가. 주심은 언제쯤 스트라이크존을 걸치고 지나가는 저 비실비실한 볼을 이해할 것인가. 가장 편향적인 방향으로 생각은 날아간다. *시집, 스윙, 민음사 마이 볼 - 여태천 야구도 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렌지색 점퍼를 입고 스탠드를 메우고 있었다. 처음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 바닥 사람들은 외다리인 줄 알았다. 짝다리를 짚고 선 폼..

한줄 詩 2018.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