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스물 아홉 살에 - 김경미

마루안 2018. 2. 15. 20:06

 

 

스물 아홉 살에 - 김경미
-12월 31일


까닭없이 불안하고 구차스럽고
참담까지 한 이십대가
이제 다신 오지 않으리라 안도하여
나는 오늘 서른이 반갑습니다
누가 내 서른에 혀를 차겠습니까?
때로는 스물 한 살,
어리석어 붙들리는 치기범이 되고
어느날은 아마 새치기꾼을
눈물 나는 국산 극장 앞에서
마흔살의 암표를 사고 있을 겁니다 끝내
평균대 위에서 맘대로 춤추는 선수
그 노련한 삶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무조건 그리 될 줄 알았던 삼십세
새물 먹고 돌아온 고통과
악연과 서로 까닭을 밝히리라
너무나 빨리 되고 싶었던 서른살
시시덕대는 척하면서 울면서도
내 안이 내 밖이 합쳐질 조짐
술렁대는 삼십대를 뒤지며 살게 되겠지요.

 

 

*시집,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실천문학사

 

 

 

 

 

 

청량리 588번지 - 김경미

 

 

그대 몸에 들끓는 균을 보네

이 세상을 다 먹이고도

다섯 광주리와 한 마리 정도 거뜬히 남을

그대 절망을 보네

이지러진 몸 위로 던져지는 꽃값에서

동정과 착란의 잎새를 털어내고 나면

때절은 이불깃 위에 뿌릴

눈물이나 겨우 댈 수 있지만

귀부인과 하녀와 매춘부로

사람을 꽃으로 만들지 않는 날이 있으리라

스쳐간 사내들 두고 간 인상착의며

더러운 지문을 모아두었다가

남들 쓰린 상처 위로 소금땀 흘릴 때

딴짓이나 하고 다닌 것들

모조리 세상 밖으로 쓸어버리고

누구나 높낮이 없는 집에서

기어코 깨끗한 사랑으로 살아봐야겠다고

이 세상 아침 점심을 배불리 먹이고

저녁까지도 먹일

그대들 눈물겨운 희망이여.

 

 

 

 

 

# 김경미 시인은 1959년 서울 출생으로 한양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쉬잇, 나의 세컨드는>, <고통을 달래는 순서>, <밤의 입국 심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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