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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 김해동

운명 - 김해동 새파란 손을 붉은 햇살 속으로 밀어 낼 때부터 내 몸은 이미 물들었는지 몰라 여리고 순한 마디들이 밀려나올 때마다 끝내 주저앉아 버릴 관절들을 염려했는지 몰라 몸에 돋은 하얀 솜털로 생애의 물기를 쓸어가며 벌레, 수십 마리쯤 먹여 살렸지 비바람과 푸르죽죽한 문을 여닫을 때마다 어떤 사연들이 씨앗으로 여무는지 딱히 몰랐다 까맣게 타 들어 간 시간만이 입을 쩍 벌리고 씨앗들을 준비한다 가을이 아름답다고 누군가 감탄하기 시작했을 때 나무들 또 다른 삶을 준비했는지 가지 끝에서부터 말문을 닫고 식음을 전폐했다 입만 딱 벌리고 숨조차 쉬기 힘든 어머니 그녀의 생애가 산소마스크에 매달려 입속으로 붉은 혓바닥이 말려들어 가고 있다 검게 물든 한 장 낙엽처럼 *시집, 비새, 종문화사 수목장 - 김해동 ..

한줄 詩 2018.03.07

미식가의 허기 - 박찬일

이 사람의 책을 참 많이 읽었지만 이제야 후기를 남긴다. 문학을 전공한 요리사란 직업이 흥미로워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 사람이 운영한다는 혹은 일한다는 식당에 몇 번 가서 음식을 먹기도 했으나 음식으로는 그리 감동을 받자 못했다. 이 책을 비롯해 그가 쓴 책은 늘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이탈리아 요리를 시작으로 한국의 오래된 식당을 찾아 문화를 발견하고 알리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음식 문화가 일천한 우리에게 이런 작가는 큰 자산이다. 외국 생활을 할 때 궁금했던 것은 왜 우리에게는 음식 문화가 부실한가였다. 프랑스, 중국, 터키 등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음식은 빼고라도 일본이나 태국 음식이 글로벌 음식으로 먹히는 것이 부러웠다. 기껏 우리 음식은 호기심 많은 몇몇 미식가의 흥미를 자극하..

네줄 冊 2018.03.07

리틀 포레스트 - 임순례

임순례 감독의 영화는 꼭 본다. 불 꺼진 객석에 앉아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가슴을 설레게 하는 영화가 몇이나 될까. 임순례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여전히 가슴이 설렌다. 특히 과거의 영화에 비해 많이 순해졌다. 데뷰작이 너무 독해서일까. 그의 영화는 무겁고 진지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가 많았다. 그 점이 내가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긴 하다. 이 영화는 순하면서도 톡 쏘는 맛이 있다. 이 영화는 음식영화다. 그래서 밋밋하게 흘러갈 수 있는 영화가 음식으로 확실하게 잡았다. 그렇다고 요즘 공중파 방송부터 종편까지 게걸스럽게 내 보내는 먹방과는 구별된다. 음식 프로가 이 정도만 된다면 얼마든지 봐주겠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배우도 어떤 감독을 만나느냐에 따라 연기가 다르다. 김..

세줄 映 2018.03.07

족두리꽃 아내 - 손순미

족두리꽃 아내 - 손순미 기장읍 청강리에 족두리꽃이 산다 철길이 석쇠처럼 달아오른 그곳에 상자같이 조그마한 집에 사는 사람이 슬며시 내놓은 화분에 산다 아내가 없는 사람이 아내 같은 족두리꽃을 심어 두었다 가진 거라곤 몸뚱이밖에 없는데 그는 온종일 밥도 안 먹고 엎드려 있다 한 마리 생선처럼 누워 있다 족두리꽃 향기가 그 안을 기웃거린다 샹들리에 같은 족두리꽃이 화려한 족두리를 쓴 연분홍 향기가 사내 품속을 파고든다 우리 다시는 태어나지 말자, 태어나지 말자 *시집, 칸나의 저녁, 서정시학 고등어 파는 사내 - 손순미 저, 소금을 칠까요? 내가 지그시 눈을 감아주자 남자의 눈이 고등어 눈처럼 우울하게 빛났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남자의 손등을 물결쳐 나갔다.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끔찍한 추억이, 집..

한줄 詩 2018.03.06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 조기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 조기조 오바로꾸 미스 김이 그만둔단다 어찌 생각하면 좀 창피하기도 해서 배가 더 불러오기 전에 오바로꾸 미스 김이 이번 달만 하고 그만둔단다 미스 김이 그만둔다니 심란해하는 총각들 중에 말은 안해도 신바람이 난 건 칙- 칙- 휘파람 불어대며 프레스 밟는 스물 일곱 박 기사다 둘이 눈 맞은 건 지난 봄 임투 박 기사 깨진 마빡을 미스 김이 머리띠 끌러 싸매준 거다 죽고 못사는 미슨 김 박 기사가 차마 한 살림 차릴 형편은 못 되어서 한 삼 년만 기다리자고 약속은 했는데 덜컥 아이가 생기고 말아 식은 나중에 올리기로 하고 그냥 살기로 했단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즤 엄마 아빠를 하나로 엮어준 거다. *시집, 낡은 기계, 실천문학사 무공해 빵 - 조기조 그녀는 이미 늙어 더..

한줄 詩 2018.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