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선의 빛 - 허연

마루안 2018. 3. 7. 20:47



사선의 빛 - 허연



끊을 건 이제 연락밖에 없다.


비관 속에서 오히려 더 빛났던
문틈으로 삐져 들어왔던
그 사선의 빛처럼
사라져가는 것을 비추는 온정을
나는
찬양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빛이
너무나 차가운 살기였다는 걸 알겠다.
이미 늦어버린 것들에게
문틈으로 삐져 들어온 빛은 살기다.


갈 데까지 간 것들에게
한 줄기 빛은 조소다
소음 울리며 사라지는
놓쳐버린 막차의 뒤태를
바라보는 일만큼이나
허망한 조소다.


문득
이미 늦어버린 것들로 가득한
갈 데까지 간
그런 영화관에
가보고 싶었다.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








여가수 - 허연



빨래집게로 집어놓은 자국 같은 쌍꺼풀이 욱신거릴 때마다 그녀의 인생이 고음으로 환하다. 상처 많은 자들만이 절감하는 고음. 벗겨진 칠 속으로 언뜻언뜻 나무판자가 드러나 보이는 무대. 그 위에 선 어떤 인생. 망해가는 소도시. 그녀는 동대문산 반짝이로 처진 살 몇 점 숨긴 채 실존보다 무거운 생을 노래한다. 이렇게 되어버린 인생은 원래 이렇게 되게끔 정해져 있었다는 듯. 그녀의 고음은 선을 넘는다. 예쁜 척해야 하는 나이를 넘어섰고, 이름을 얻겠다는 미망을 넘었고, 출산할 수 있는 나이를 넘어선.... 어느 것도 되돌릴 수 없는 여가수. 그녀와 관계된 몇 개의 이별과 나를 울린 몇 개의 이별이 범벅이 된 노래를 나는 듣는다. 시끌벅적한 회식 인파 사이에서 나는 듣는다. 슬퍼진 것들은 이미 슬픈 것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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