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운명 - 김해동

마루안 2018. 3. 7. 20:02

 

 

운명 - 김해동

 

 

새파란 손을 붉은 햇살 속으로 밀어 낼 때부터

내 몸은 이미 물들었는지 몰라

여리고 순한 마디들이 밀려나올 때마다

끝내 주저앉아 버릴 관절들을 염려했는지 몰라

 

몸에 돋은 하얀 솜털로 생애의 물기를 쓸어가며

벌레, 수십 마리쯤 먹여 살렸지

비바람과 푸르죽죽한 문을 여닫을 때마다

어떤 사연들이 씨앗으로 여무는지 딱히 몰랐다

까맣게 타 들어 간 시간만이 입을 쩍 벌리고

씨앗들을 준비한다

가을이 아름답다고

누군가 감탄하기 시작했을 때

나무들 또 다른 삶을 준비했는지

가지 끝에서부터 말문을 닫고

식음을 전폐했다

 

입만 딱 벌리고 숨조차 쉬기 힘든 어머니

그녀의 생애가 산소마스크에 매달려

입속으로

붉은 혓바닥이 말려들어 가고 있다

 

검게 물든 한 장 낙엽처럼

 

 

*시집, 비새, 종문화사

 

 

 

 

 

 

수목장 - 김해동

 

 

꽃비가 내린다

분홍진물이 눈처럼 쌓인 길을 따라

화장막으로 떠나는 모자여

 

향기 없는 벚꽃 사이로

서러울 것 없는 하늘이

비만 내리고

이승에 젖은 견고한 물기가

불구덩이 속으로 사라질 때

아!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육신의 이름

아 . 버 . 지

 

비는 내려서

뿌리 깊은 슬픔을 다독여 주는가

상주처럼 서있는 검은 나무들

하얀 꽃잎들을 붙이고 떠날 줄 모른다

 

작은 아들 작업장으로

한 상자 들려 온 당신

천년을 산다는

어린 느티나무 묘목 밑

육십 평생이 한 줌으로 날아든다

 

이제 젖은 가슴만 묻으면

혼령처럼

연초록 잎들은 다시 피어나리라

 

 

 

 

# 김해동 작가는 경남 진해 출생으로 홍익대 미술학과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25회의 개인전과 400여 회의 그룹전을 가졌다. 현재 창원대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비새>가 첫 시집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로운 인연을 위해 - 김일태  (0) 2018.03.07
사선의 빛 - 허연  (0) 2018.03.07
족두리꽃 아내 - 손순미  (0) 2018.03.06
흰 소 한 마리 구름을 끌고 - 정영  (0) 2018.03.06
향기 난다 - 박철  (0) 2018.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