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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게 - 정윤천

추억에게 - 정윤천 우리들 여린 발돋음으로 꼰지발을 세우고 거기 이른 저녁별 하나 따 가지고 싶었던 그 봄밤에의 기억, 떠올릴 수 있겠는지요 달마중 핑계로 손잡고 나섰다가 괜한 일로 다투고 왔었던 어떤 일이며 숨바꼭질로 시들해진 해름참이면 영님이네 들집 울타리 바람벽에 기대 서서 먼 산 허리께 걸린 취한 놀빛 속에 취해 우리들 눈길들이 또한 엇비슷한 어지러움 타곤 하였습니다 해 진 언덕 저편으로 겨운 하루나절을 밟고 오시던 우리들 아버지들의 땀내 묻은 머리칼과 무등을 타고 되오던 길에 바라보인 옛집 위의 저문 고적함 너머로 깊어가는 저녁의 연기 그 고운 저물녘에 이제 다시 가볼 수는 없겠지요 살림 났더라는 이야기 언젠가 바람 속으로 언뜻 전해도 전해도 들었습니다만 우리들 잊혀진 날들만큼의 꼭 그만해진 크..

한줄 詩 2018.03.05

어제처럼, 그 어제처럼 - 최준

어제처럼, 그 어제처럼 - 최준 아버지 오월이면 꽃을 심었다 나는 수조에 물을 담아 연신 꽃이 뿌리내릴 흙을 적셔주고 그러다 그 여자아이 놀러오면 함께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꿈을 꾸었다 늘 그랬다 어제처럼 또 그 어제처럼 세월이 세월을 데리고 가고 아버지 천둥 번개 다 맞으셨다 꽃밭에서 꽃처럼 고민하고 햇빛 그리워하고 땀흘리셨다 내리는 햇빛 다 못 받고 흐르는 땀 닦지 않고 아버지 늘 아프고 수척했던 아버지 꽃과 함께 떠나셨다 그 여자아이 잊혀진 꽃말처럼 떠나갔다 새벽이면 의롭게 죽어가는 꽃밭 가득히 서리 내리고, 떨리는 손으로 꽃씨를 받는다 흔적없이 내리는 궂은 비 다 맞으며 나는 떠날 것들의 길을 열어준다 가을 그 길도 비에 젖고 마르지 않고 *시집, 너 아직 거기서, 도서출판 모모 얼음의 나라 - ..

한줄 詩 2018.03.05

중년을 보다 - 김일태

중년을 보다 - 김일태 싸울 상대가 보인다는 것은 선수가 되었다는 증거다 두 발 들고 항복하는 것처럼 엄살떠는 과장도 필요하다 최후의 항전처럼 작은 일에도 독거품 뻐끔뻐끔 물어야 한다 전진 후퇴 전법은 고전적인 것 좌우로 밟는 노련한 발놀림으로 이념도 유연하게 건너야 한다 들어와 덤빌 테면 덤비라고 기권은 없다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더라도 두려움은 나를 지키는 호위무사라고 내질러야 한다 함부로 건들면 같이 죽는 수 있다고 두 주먹으로 가슴 치며 파이팅 외치는 인파이터 복서 같은 게 같은 중년(中年) *시집, 부처고기, 시학사 녹슨 관계 푸는 법 - 김일태 녹슨 나사같이 해묵은 갈등 섣불리 억지로 풀려 들면 나사처럼 대가리만 부러져 영원히 풀 길 없어지고 말지 사람이나 나사나 주위를 조심조심 두드려 덥혀 있..

한줄 詩 2018.03.05

쉰 살의 맨손체조 - 강형철

쉰 살의 맨손체조 - 강형철 적수공권으로 세상을 사는 일이야 견디면서 어떻게 해왔다지만 쉰 살에 맨손체조는 어찌해볼 수 없는 깜깜 절벽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일은 쉬워도 360도 돌리는 일은 안 된다 팔을 흔드는 일은 쉬워도 동시에 발을 움직이는 동작은 어렵다 습관적으로 숨이야 쉬어왔지만 팔다리를 흔들면서 숨 쉬는 일은 안 된다 쉰 살에는 일들이 팔다리 어깨 발 도처 어디든 눌어붙어 있어서 그 일들에게 눈치가 보여서 맨손체조는 어렵다 단순한 소주잔 꺾기나 일에 눌려 한숨을 쉬는 것은 몰라도, *시집, 환생, 실천문학사 틈 - 강형철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그는 24시간 사우나로 간다 구두를 벗어 번호표를 챙기고 런닝과 팬티를 벗어 옷장에 넣은 뒤 열쇠를 발목에 찬다 샤워를 하고 온탕에 몸을 담갔다가 숯가마로..

한줄 詩 2018.03.04

선배 수업 - 김찬호, 김융희 외

이 책은 읽기에 조금 거슬리는 경어체 문장에도 불구하고 술술 읽혀서 다행이다. 아마 여섯 명의 강사가 평소 내가 관심을 두던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청중이 되어 강의실에 앉아 듣는 심정으로 단숨에 읽어냈다.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노년 인구 때문인지 요즘 중년 이후에 대한 자기 관리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편인데 대부분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책들이다. 허술한 내용으로 시대에 편승해 독자를 현혹하는 저자와 출판계의 상술 또한 대단하다. 그들도 먹고 살아야겠으나 출판계 만큼은 좀 당당하게 실력으로 승부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읽고 나서 배신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아무 책이나 읽지 않는 내가 열 권 읽어 겨우 한 권을 이 블로그에 언급할 만한 책을 건진다. 바로 이 책 선배 수업도 그중 하나다..

네줄 冊 2018.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