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비석을 보며 - 박종해

마루안 2018. 3. 29. 20:33



비석을 보며 - 박종해



외딴 산자락 무덤 앞에
비석이 제 홀로 서 있다.
주인은 땅 속에 누워 긴 잠을 자는데
파수병처럼 혼자 서서
그의 전 생애를 등에 지고 있다.
모든 비석이 그러하듯이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잘 했다든지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는 말은 적혀 있지 않다.
비석에는 빛나고 아름다운 글로
그의 일생을 덧칠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다.
밤이면 달과 별이
낮이면 태양이
그의 일생을 읽고 갈 뿐


비바람 눈보라 속에
그의 전 생애도 차츰 희미해져 갈 것이다.
그의 영혼은 어디에 떠돌고 있는가
어느 세월 어느 곳에서 환생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는가
또 하나의 비석을 남기기 위해서
그가 전생에 했던 것처럼 또다시
한 생애를 포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집, 하늘의 다리, 동학사








절벽에 서서 - 박종해



우리 친구들은 가을 하늘을 보며
허공에 뱉듯이 말한다.
그에게 그렇게도 빨리
겨울이 다가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빗살처럼 잎이 다 져버린
나목들만 주뼛주뼛 늘어선
겨울산을 바라보듯


그의 머리에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을 본다.
백지장 같은 얼굴 위에
사신(死神)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비친다.


"암이란다 기가 차서"
그는 몇 길이나 되는 지하에서
물을 길어 올리듯 숨가쁘게 말한다.


지금 그는
절벽 끝에 간신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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