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부랑자의 밤 - 최돈선

마루안 2018. 3. 28. 23:31



부랑자의 밤 - 최돈선



99%는 가라
1%를 위한 가치만이 존재한다
나머지는 짝퉁이고 가짜인생이고 들러리들이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독을 품은 양귀비이다
낡은 혁명이 펄럭이는 거리의 골목과
지하도에
지린내 나는 비애들이 음습한 버섯이 되어 자라는데
총을 품지 않은 무정부주의자만이 고독할 뿐이다
이곳에 늙어버린 불세비키는 없다
다만 썩지 않는 자존심만이 눈 부릅뜬 채 굳어 있다
비오는 빌딩 숲으로 태양이 진다
집 없는 뉴욕의 부랑자는 지하열차를 타고 도시의 끝으로 간다
할렘의 스산한 바람이 대서양 서쪽에서 죽는다
불 꺼진 횃불을 든 자유의 여인아
허드슨 강아
바람에 펄럭이는 날들아
자본주의의 심장 월가의 밤아
누가 빈 손 하나로 저 꺼진 불을 당겨다오
눅눅한 침몰선의 밤
죽음조차 아름다워 너무 쓸쓸한 밤



*시집, 사람이 애인이다, 한결








그 골목에 가면 - 최돈선



늘 그리운 편지처럼 그 골목으로 가고 싶다. 그 골목엔 잃어버린 바퀴 때문에 울고 있는 노란 장난감 자동차가 버려져 있고 애인에게 버림받은 고개 숙인 한 여인이 낙서처럼 구겨져 벽에 쓸쓸히 기대어 있다.
그 골목에 가면 어느 날 지친 구름 몇 송이 솜사탕장수 막대기에 걸려 있다. 그것은 달콤한 피로(疲勞), 백만 년 동안의 길고 긴 잠인 것이다.


그 골목엔 철 지난 휘파람소리 게으른 햇살처럼 흐르고, 이제는 늙어서 총을 뽑기도 힘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긴 그림자로 서 있다. 눈매는 그늘지고 푸르고 깊다. 아무도 그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인진 모르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역시 클린트 이스트우드인 것이다. 어디선가 단풍잎 한 장 나붓이 날아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가슴에 우수처럼 얹힌다.


타앙...


그 골목에 가면 누구나 나부낀다. 그리워서 나부낀다.
그리움이 깃발처럼 나부끼면 어디선가 종이 울 것이다. 백만 년 동안 그 그리움들이 목화솜처럼 내릴 것이다. 모든 것이 무가 되어 바람조차 화석으로 남을 것이다.





# 최돈선 시인은 1969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1970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 동시 당선, 1970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에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칠년의 기다림과 일곱 날의 생>, <허수아비 사랑>, <물의 도시>, <나는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애인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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