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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글동네의 그리운 풍경들 - 정규웅

서점을 서성거리다 우연히 글동네의 그리운 풍경들이란 제목이 눈에 들어와 고른 책이다. 그것도 30년 전인1980 년대의 문단 풍경이라니 그 시절을 참 철없이 거쳐왔던 내가 솔깃했음은 당연하다. 나의 20대가 워낙 폭풍처럼 지나갔기에 당시의 문단 풍경이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없다. 대부분 나중 다른 사람의 전언이나 글에서 읽은 기억인데 이 책에서 읽은 당시의 문단 풍경이 무척 흥미로웠다. 나는 근본 없는 문학병을 앓았다. 누구에게 진단이나 처방을 받아 본 적도 없었고 혼자 앓는 병은 사방이 毒이었다. 무병처럼 시름시름 앓던 문학병은 이제 만성질환이 되어 중년의 몸에 잠복되어 있다. 어쩌면 영원히 혼자 앓다 죽을 아마추어 병일 것이다. 돌아보면 그 병이 고단한 노동의 시름을 잊고 살게 해준 삶의 비타민이었..

네줄 冊 2018.05.29

적당한 때 - 임곤택

적당한 때 - 임곤택 춤추며 손목 끌던 것들 끝내 나를 버리는가 어떤 생각은 가시가 되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커다랗게 몸을 부풀린 작은 것의 몸집 시들 것은 꼭 그렇게 시드는데 저녁을 부르면 겁먹은 짐승 한 마리 온다 선인장을 기를 때처럼, 물을 주거나 버려두거나 무엇을 기다린다면 정류장은 무관한 버스들로 꽉 차고 손가락을 명주에 감싸 불태운 사람을 안다 적당한 봄비었는지 그렇게 저녁을 기다린다고 말하면 무서운 짐승 한 마리 온다 송곳니와 빳빳한 눈썹 세워 으르렁거린다 거기 엉긴 적의와 꽃잎들을 나는 하나씩 떼어내야 하는가 배고를 때 허기, 라고 잘라 말하기 망설인다 그렇게 별말 없이 열 번 이상 손가락을 불태우고 선인장을 기르고 다가오는 사랑은 끝내 지켜보고 *시집, 너는 나와 모르는 저녁, 문예중앙 모..

한줄 詩 2018.05.29

살아 있는 구간 - 박승민

살아 있는 구간 - 박승민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릴 때 진짜 버리는 거다. 길은 끝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끝날 때 비로소 끝난다. 그 살아 있는 한 구간만을 우리는 뛸 뿐이다. 저의 몸이 연필심처럼 다 닳을 때까지 어떤 흔적을 써보는 것인데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부여받고 평생, 눈밭에서 제 냄새를 찾는 산 개처럼 킁킁거리다가 자기 차선과 남의 차선을 넘나들며 가는 것이다.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기기 전까지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차올라오는 파도처럼 자기를 뒤집기 위해 자기 목을 조우지만, 눈밭에 새긴 수많은 필체 중 성한 문장은 없고 잘못 들어선 차선에서 핏덩어리로 뭉개지고 있는 몸. 쏟아 붓는 백매(白梅)는 얼굴에 닿자마자 피투성이 홍매(紅梅)로 얼어붙는다. 자신의 영정(影幀)을 피하듯 모두들 눈길..

한줄 詩 2018.05.28

짧은 윤회 - 채풍묵

짧은 윤회 - 채풍묵 아내가 백팔 배를 하는 동안 나는 딸아이 손을 잡고 푸른 구름과 흰 구름 사이에 떠있다 딸과 걷는 불국사 바깥마당은 다리와 다리 사이를 오가며 유년과 중년이 함께 하는 짧은 윤회, 노을빛 문 너머 불국토를 보려고 직경 오 리의 바윗돌이 다 닳도록 오며 가며 옷자락을 스친 사람들이 한데 모여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한번은 청운교 젊은 쪽에 서서 또 한번은 백운교 늙음 쪽에 서서 이끼 낀 석축같이 얼굴을 포개고 현재를 과거로 만들고 있다 *시집, 멧돼지, 천년의시작 생일날, 봄날 - 채풍묵 삼백오십만 년 전 인류 출현 이래로 어떤 면에서 역사는 생일의 기록이다 일만 년 전 문명의 씨앗종자가 울타리 안에 하얗게 뿌려졌고 보편성이란 종교가 뒷골목을 걸어 들어와 양심의 가로등을 켠 것이 이천..

한줄 詩 2018.05.28

조장(潮葬)은 어떨까 - 강형철

조장(潮葬)은 어떨까 - 강형철 히말라야 산록에 살고 남은 육신을 토막 쳐 독수리에게 공양하는 천장(天葬)이야 아름답지만 뜯고 남은 뼈를 갈아 고명처럼 짬빠를 뿌려 독수리들이 남김없이 먹고 나면 흔들리는 들풀 따라 적셔진 핏방울도 하얗게 마른다지만 천장 터에 남은 도끼나 칼이 너무나 섬뜩해 아무래도 죽음의 방법으론 좀 거시기해 해망동 조금 못 가 죽어 뒤집힌 망둥어가 누워 있는 서해 긴 썰물 뒤 개펄에 알몸으로 엎어져 짱뚱어에게 한 입 병어에게도 한 입 그렇게 뜯겨 사라진다면 그래도 남아 개펄에 남은 것이 있다면 흐린 하늘 사이로 간신히 빛나는 햇살에 가끔 옆구리께도 말리면서 발가락 무좀도 삭히면서 슬슬 부는 바람에게 마지막 선처를 부탁해 그냥 젖어 사라질 수 있다면 이를 일러 조장(潮葬)이라 부르고 나..

한줄 詩 2018.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