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적당한 때 - 임곤택

마루안 2018. 5. 29. 18:25

 

 

적당한 때 - 임곤택

 

 

춤추며 손목 끌던 것들 끝내

나를 버리는가

어떤 생각은 가시가 되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커다랗게 몸을 부풀린 작은 것의 몸집

시들 것은 꼭 그렇게 시드는데

저녁을 부르면 겁먹은 짐승 한 마리 온다

선인장을 기를 때처럼, 물을 주거나 버려두거나

무엇을 기다린다면

정류장은 무관한 버스들로 꽉 차고

 

손가락을 명주에 감싸 불태운 사람을 안다

적당한 봄비었는지

그렇게 저녁을 기다린다고 말하면

무서운 짐승 한 마리 온다

송곳니와 빳빳한 눈썹 세워 으르렁거린다

거기 엉긴 적의와 꽃잎들을 나는

하나씩 떼어내야 하는가

 

배고를 때 허기, 라고 잘라 말하기 망설인다

그렇게 별말 없이

열 번 이상 손가락을 불태우고

선인장을 기르고

다가오는 사랑은 끝내 지켜보고

 

 

*시집, 너는 나와 모르는 저녁, 문예중앙

 

 

 

 

 

 

모퉁이 돌면 - 임곤택

 

 

내가 닿자 당신은

손가락 길러 몸을 빚기 시작한다

안 보여서 우리 살아도 되는 곳

 

휩쓸리는 머리끝은 노래를 좋아한다

떨어진 나뭇잎은 예쁘지만 줍기 싫다

당신의 굴곡은 무뎌서

우리는 기대거나 서로 껴안고

 

닳은 신발, 가까운 사람들은 그게 늘 걱정인데

그것이 우리에게

꼭 맞는다는 사실은 모른다

넘어지고 일어서는 일처럼 우리는 금세 닳는다

 

당신은 생각을 빠뜨렸다 아카시아에, 향기와 가시에

세상이라고 불리는 몸

그것이 감싸 안은 투명한 부피

 

무릎이 부딪칠 때 우리는

이름이나 얼굴을 익히려 하지 않고

 

당신에게 머리칼을 잘라주는 어깨

소매는 하얗게 된다

뒷문을 열고 들어오는 긴 계단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다

 

시작하다 멈춰도, 눈이 빠져도

묻지 않고 우리는

 

 

 

 

*시인의 말

마트 하나는 문을 닫고
편의점은 두 개 더 늘었다

담배와 연기
술이 채워진 아메리카노 미들 사이즈
이런 아침은 어떤가
창 너머 창들은 안녕하신가

일찍 싸우고 늦게까지 위로받으려는
사내들의 고성방가
두 겹으로 주차된 자동차

누가 가장 좋은 값을 치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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