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맹세는 안녕하신가요 - 최대희

마루안 2018. 5. 28. 19:53



맹세는 안녕하신가요 - 최대희



그의 콧등에 좁쌀 만한 주근깨가 보이는
환한 밤이였습니다
둘이는 그 달을 보며
유리알 사랑이 변치 말자고
덩굴손으로 도장 찍듯
밤하늘에 별을 심었습니다


다음날부터 밝았던 그 달은 점점
야위어가더니 급기야 사라져버렸습니다
어쩌면 좋아, 너무 볶아진 참깨처럼
속을 까맣게 태우고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시간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사라졌던 달이 나타나 살이 통통해지더니
다시 또 시름시름 야위어가고
가슴은 계속 벌렁거리고
왜 하필 저렇게 변덕스런 달을 보며
약속을 했을까?
해를, 푸른 하늘을, 산을, 강철을
성벽을 하다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 하나도 없어
제풀에 지치고 말았습니다만


내 마음도 내가 알지 못하는데
환했던 그 맹세는 아직도 안녕하신가요?



*시집, 그리움은 오솔길에 있다, 연인








노인 - 최대희



장편소설의 마지막 책장을 넘기듯
한때 가장 아름다웠던 꿈들을 접으며
깨어진 보석들의 남은 광채를 쓸고 있는
그림자를 본다
그리하여 지금은
떠났던 모든 길 위에서
돌아오는 날, 우리 앞에
저녁 일곱시의 저무는 육체와
원죄를 지워가는 영혼의 우마차가
조용히 한자리에 앉아 있다
오랜 시간의 손때가 묻은
낡은 책 표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