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通

실천문학 2022년 봄호에서 만난 시

마루안 2022. 3. 24. 22:21

 

 

 

 

천변 풍경 - 이진명

 

 

계절 바뀌도록 걸음 뜸했던 이웃 천변에

천변 풍경이 생겼다

 

왜 아닐까 당연히 천변이니

천변 풍경은 생겨나는 것

 

물을 것 없이 죽순처럼 커피 커피 커피

세상 동네마다 카페가 돋는 시절

 

웃었다 옛날 감성 복고풍 찐 냄새

대놓고 피운 지난 연대의 이름표

나무판에 한자로 새겨 단 川邊風景

 

버스 다니는 큰길에서는 천변 풍경 보이지 않는다

버스 다니지 않는 작은 다리 길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다리 아래로 예닐곱 돌계단 내려서야 만난다

 

천변 풍경 테크에서 커피를 앞에 놓고 앉았다

앉아 봤다 그래 봤다 커피를 넘겼다

계절은 또 곧 바뀔 것이다 시선을 멍히 던졌는데

한판 투명한 커다란 거울처럼 물 얼굴이 돈다

 

북으로 멀리 북한산 이마가 마주쳐 오고

남으로는 멀지 않게 미아리 고개가 오래 있다

동으로는 누군가가 빠져나온 누군가의 집이 너머 너머에

서쪽은 가려졌지만 틀림없이 붉게 해지는 나라

 

물 얼굴이 물속으로 돌아오고 작게 물소리 돋는다

 

다리 위 길과 큰길에는 적당한 차량과 사람들 오간다

크게 번잡하지 않고 예부터 계곡물 내리는 동네

 

나 홀로 손님 천변 풍경에서 북으로 세 정거장을 더 세면

갖은 번호판 달고 서울 사방 끄트머리까지 종생을 달린

갖은 노선버스의 집 곤한 기름 냄새의 종점이 있다

 

천변 풍경에 무릎담요를 개켜놓고 마저 더 가려 한다

천변이 끝나는 마지막 기름 냄새의 그 종점까지를

 

 

*실천문학 2022년 봄호

 

 

 

 

당신은 새해 인사 문자를 몇 통이나 받으시나요 - 이진명

 

 

떠오르는 해 새해에 설날에

당신은 몇 통의 문자 인사를 받느냐고

 

자신은 백 통은 받는다고

그는 은근히 나를 궁금해했다

 

대단하구나 백 통이나

오면 가는 가면 오는 인사일 터인데

마음씀과 수고가 대단하구나 칭찬

 

길은 로마로

길은 사람으로 통할지니

자랑스럽겠지 좋은 일

그대여 로마로 사람으로 종횡으로

인생길 뻗어 뻗어 가시라

 

세상에는 참 별 궁금이 다 있지

나는 두 통에서 네 통 사이다

어느 해는 딱 한 통이었다

 

미스터리다

새해 문자 인사가 설날 인사가

왜 해마다 한 통에서 네 통 사이로는 꼭 오는지

그래서 꼭 그만큼 답장을 너절하게 쓰게 하는지

 

헤이, 세상, 그딴 것 좀 한 개도 들어오지 않게 할 수 없나

왜 하나에서 넷 사이로 해마다 지지한 감정을 보내나

정이라고 따뜻하니 덕분이라고 행복하라고

 

헤헤이, 나 죽을 때 아무것 없이 하얗게 죽고 싶거든

그리울 이름도 고마울 이름 인사할 이름도 없이

사람 없이 얼굴 없이 한 마음도 없이

그런 안녕 한 쾌는 이룰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새해 설날 문자 인사 한 통에서 네 통은 아무래도 신기방기다

세상이 멋대로 재미로 신기방기의 너울 쓰기를 좋아하는지

뭐 세상님 한 분이라도 재미있으면 됐고 됐고

 

 

 

*이진명: 199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세워진 사람>, <단 한 사람>,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서정시학작품상, 일연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