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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 류근

중독 - 류근 내게 아무런 기쁨 없으니 나무들은 저희끼리 한 시절의 잎사귀를 불렀다 흩어놓고 몇 번씩 비가 내리는 저녁이 와서 더욱 캄캄해진 귀를 막게 했을까 세상에 오지 않는 노래와 약속들은 아프고 아무 데서나 쓰러지고 싶었던 나날들은 내게도 고통이었을 테지만 이젠 어쩔 수 없고 어쩔 수 없음으로 하여 나는 더 멀리 길 바깥으로 떠밀려간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서는 모든 것들이 뚜렷해서 귀를 막지 않아도 내 고통이 잘 들리고 잘 자란 벌레처럼 울 수도 있었을 것이므로 점점 더 깊은 곳에 나는 나를 버려두는 것이다 불타지 않는 기억들을 집으로 지은 사람답게 함부로 생애의 알 수 없는 힘들을 견디는 것이다 그러나 바람의 길과 빗방울이 오는 길과 시간이 흘러가는 길을 그 바깥에서 파랗게 볼 수 없다는 것이 ..

한줄 詩 2019.01.03

출근에 대하여 - 박정원

출근에 대하여 - 박정원 내가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는 것은 일에 대한 불타는 사명감에서이다 어제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서이다 잠자는 서류들을 깨우기 위해서이다 제일 먼저 창문을 열고 싶기 때문이다 같이 퇴근했던 사람들을 맨처음 보고 싶어서이다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맑은 정신으로 정리하기 위함이다 그래야만 승진을 하기 때문이다 새벽 공기가 상큼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바지런히 쪼개어 쓰려니까 그렇다 아니다 순전히 습관 때문이다 아니, 아니다 언젠가는 이 사무실과도 헤어져야 하니까 그렇다 신지식이나 기술도 없어 돈벌이 할 곳이 마땅찮아서이다 사실은 그만 둘 배짱이 없어서이다 *시집, 꽃은 피다, 시문학사 사람다운 사람 - 박정원 외진 곳에 홀로 핀 들꽃일수록 아름답다 오랜 시름을 견뎌낸 매미소리일수록 우렁차다 깊..

한줄 詩 2019.01.02

생물 시간 - 김주대

생물 시간 - 김주대 너무 먼 어제로부터 여기까지 와서 돌아누울 때마다 문신처럼 새겨지는 기억들 앞에 속수무책이다 내가 본 것을 사람들도 보았을까 내가 본 것 때문에 다른 내가 되어서 내가 들은 것 때문에 다른 노래를 부르며 열꽃 피는 몸 안에 수장되려나 육신의 병과 함께 시간의 깊이에 도달하려던 어리석음이 갈 수 없는 곳에 닿을 때마다 흘러나오는 신음 뒤척이면 불같은 열 번진다 평화로운 애비가 되지 못한 죄로 악몽을 꾸다 깨어 젖은 몸을 내려다본다 강가 나뭇가지에 걸린 시신처럼 부은 몸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이 시반을 만든다 손끝이 떨린다 너무 먼 어제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기억을 입은 몸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오랜 시간까지 내려가 식은땀 쪽으로 돌아눕는다 *시집,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

한줄 詩 2019.01.02

내 나이는 - 권순학

내 나이는 - 권순학 내 나이는 내게 달린 추다 걸음마다 비틀거리는 나 햇살이나 그림자처럼 더나 덜 나가면 얼른 기우뚱 제 몸 던져 제자리 잡아 주는 추다 새가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것은 박차고 밀치는 날갯짓 때문이 아니라 비우고 또 비우려는 그의 추 때문이리라 언제부턴가 내게 돋은 날개는 푸드덕거릴 뿐 아무 때나 새가 되지 않도록 제 속 구석구석 비우고 다지는 내 추 버거워지는 날 나 그때 돌아가리라 *시집, 바탕화면, 시학사 달인 - 권순학 비탈진 허리는 균형 잡기 달인이다 험한 곳일수록 궂은 날일수록 그의 묘기 빛을 더한다 사시사철 산비탈 오르내리며 단 한 번도 구르지도 미끄러지지도 않으려고 오뚝이보다 더 부지런 떤 그의 내력 허리 굽혀 보지 않은 자는 알 리 없다 해를 등진 비탈 아래 담벼락에 ..

한줄 詩 2019.01.02

전조 - 손월언

전조 - 손월언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라는 노신의 수상록이 있었지 그 책을 읽고 싶다 한 번은 읽었을 텐데 내용은 전혀 기억에 없고 나는 그 책을 버린 것 같다 잡지 등등과 한 묶음으로 집 앞 쓰레기통에 내놓았으리라 .....그리고 나는 살았다 그리고 나는 여러 꽃들을 보았지만 내일의 꽃을 본 적은 없고 저녁에 그 꽃을 주워본 적도 없다 빨리 돌려본 필름 속처럼 바삐 살며 나는 어느 때 꽃을 잊었으리 세월이 한참을 지나는 지금 아침 꽃을 왜 저녁에 주워야 하는지 알게 된 지금..... "꽃은 내일 필 것이다" 그래, 그 영원한 전조로서의 삶을 알 것도 같은 지금 *시집. 마르세유에서 기다린다, 문학동네 바닷가 - 손월언 겨울도 끝이 나고 바람도 잠든 양지에 얼굴을 그러쥔 여자 그 여자는 춥고 바람 불..

한줄 詩 2019.01.02

그대 돈맛을 좀 아시나 - 박형권

그대 돈맛을 좀 아시나 - 박형권 돈맛을 아시나 남해바다 멸치처럼 씹어도 썹어도 국물이 나오는 마법 같은 그 맛을 아시나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서 과메기 빼어 먹듯 항상 마지막 돈을 쓰는 나에겐 돈맛이 약간 비리지 어물전에서 돈맛을 좀 아는 이들의 토론을 들었어 나는 세 마리 만원 하는 고등어를 네 마리 달라고 흥정을 붙였는데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함박눈 내리며 일진광풍이 불며 한 여자가 자가용에서 내렸어 이건 돈 쓰는 것도 아니라는 듯 동죽도 사고 주꾸미도 사고 병어도 사고 참조기도 사고 펄떡이는 오대양 육대주도 상자째 사더니 자기앞 수표를 꺼냈어 돈에 이미 이력이 난 어물전 주인은 대가리를 쳐내고 지느러미를 자르고 돈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냈어 내가 노린 물간 고등어가 고독해 보이는 늦은 저녁이었어 ..

한줄 詩 2018.12.31

구례역 - 방민호

구례역 - 방민호 이곳은 사내의 옆구리 같다 향기도 악취도 없이 혼자서 텅 비어 있는 옆구리 그 옛날 영등포역에서 그이를 만난 후 옆구리에서 옆구리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빛이 없었다 종착역이 없었다 그이는 커다랗게 화장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봤는데 왜 나를 붙잡지 않았을까 그이는 옆구리처럼 고요했다 구례역은 이토록 고요한데 노란 불빛 점점 들어 나를 일구팔사 년으로 데려간다 그때 내가 다르게 살 수 있었을까 빙어의 옆구리 같은 그이의 옆구리를 끌어안았다면 어느 종착역에 내릴 수 있었을까 오늘밤 이 멋진 케이티엑스에서 일구팔사 년의 쇠바퀴 소리가 난다 파라솔 든 창녀들이 철길을 가로지를 때 나는 궤도도 모르면서 내가 탄 기차만을 사랑했다 구례에서 남원 그 다음엔 익산 그 다음엔 바다, 고기잡이 배 점점황으로..

한줄 詩 2018.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