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객이거나 그림자이거나 - 나호열

마루안 2019. 1. 3. 21:50



객이거나 그림자이거나 - 나호열



나를 부르면 그가 온다
절뚝이며 먼 길을 꼬리로 달고
초식도 아니고 육식도 아닌 퇴화의 이빨을 드러내며 오는 사람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굶부린 사막의 아가리 속으로
기꺼이 사라지는 수많은 그는
내가 호명했던 나
어둡고 긴 골목 같은
목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그믐달처럼
어딘가를 향해 흔들었던 깃발이었다가
껍데기만 남은 그림자를
홑이불로 덮는다


한낮에는 갈 길이 멀고
밤이 깊으면 머무를 곳이 두렵다
객이거나
그림자이거나



*시집,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문학의전당








이순(耳順) - 나호열



소귀고개 넘는다
주인과 함께 들일 마치고
서산을 향하여 무릎 꿇고 귀 세운
소 잔등에 올라타는 것이다


코뚜레 벗겨주고
워낭도 풀어주고
같이 가자
뉘엿뉘엿 저물어 가자
귀한 소식 올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잠든 적 없어 예쁘고
순하여 기쁘지 않으냐


오르는 길 힘들다 하지만
내리막길은 더 서러워
홀연히 소는 사라지고
해진 신발처럼
귀 한 짝 하늘 모퉁이에 걸려 있다


나머지 한쪽은
혹시 몰라 고개 너머에 두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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