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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블루 - 서규정

내 안의 블루 - 서규정 낙석 하나가 분화를 꿈꾸는 지층을 깨우듯 내 몸을 흔드는 정체불명의 힘, 블루라는 낯선 말이 간간이 극장 포스터나 술집 이름으로 등장할 때에도 뭐 현대인의 색다른 기호나 유희성이겠거니 하다가 자갈치 물양장에서 은하호를 보는 순간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어 전선과 전선이 담쟁이 넝쿨처럼 우거진 교각 밑에선 노약자 노숙자들은 노을과 놀고 관리들은 꼬리 잘린 도마뱀과 놀고 공적자금은 밑 터진 독과 놀고 우울이 껌처럼 늘어붙는 거리 평생을 구두 발자국만 새긴 어느 판화가의 생애를 위해서라도 어디로 떠나가 줄까 더 이상 발자국을 뜯어 먹히기 싫어…그러니까 얼마나 이 땅의 기다림과 그리움들이 다했으면 덧문을 닫아 걸 이 나이에 나를 끌어내는 정염의 덩어리를 찾아 맨발로 99톤 은하호에 오르기 ..

한줄 詩 2018.12.28

시베리아행 열차 - 오광석

시베리아행 열차 - 오광석 롱코트 정장을 보며 쇼윈도를 기웃거리다 헐렁한 청바지에 파카로 몸을 감싸던 스무 살 즈음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베리아의 공기를 몰고 와 폐 속을 헤집고 나왔을 때 그곳을 동경하게 되었다 지나치면 잊어버리는 짧은 단상들 마흔을 향해 달려가다가 떠오르는 스무 살의 겨울은 열차가 중간에 잠시 쉬어가는 간이역 같은 거 역에 앉아 시베리아행 열차를 기다리던 나는 바람을 타고 오는 기적 소리에 동그란 눈으로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칼바람 아리는 도시를 뒤로하고 가보지 못한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사람 냄새 가득한 삼등 열차 구석 자리에 앉아 일생을 꾸벅꾸벅 졸고 싶었다 황혼 즈음에 도착하는 하얀 초록의 시베리아 포근한 오두막에 누워 써먹을 데 없는 지폐들을 불쏘시개 삼아 잠들고 싶..

한줄 詩 2018.12.28

억새, 여름 이후 - 한명희

억새, 여름 이후 - 한명희 늘 궁금했다 최루탄을 앞세운 바람에도 물폭탄에도 허리 꼿꼿하던 네가 절벽 끝에 입을 대고 까마득히 떨어지는 땀방울로 근근히 목을 축이던 네가 도착하지 않은 시간을 위하여 바라고 빌어왔던 모든 게 군화가 밟고 지나간 집에 피던 과꽃 같아서 언 몸이 불덩이가 된 채 걸핏하면 들에 나가 온종일 서슬 푸른 들이 되던 네가 어느 날 뙤약볕 아래 삽질하던 농부들의 물을 물을 찾다가 저수지에 비친 제 모습이 끝도 없이 미끄러지던 낭떠러지, 능선 같아서 산속으로 들어갔는지 심해 어디로 잠수를 탔는지 오늘도 수취인불명의 주소가 되어 되돌아오고 되돌아오는 네가 백발이 되어 흘린 눈물인 듯, 땀인 듯 날카롭게 뼈만 남은 줄기마다 이슬방울 수정처럼 맺혀 있는 네가 *시집, 마른나무는 저기압에 가깝..

한줄 詩 2018.12.27

동양방랑 - 후지와라 신야

그의 책을 언제 읽었더라, 돌이켜 보니 오래전이다. 서른 중반이 넘도록 중심을 잡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떠돌던 친구가 훌쩍 인도로 떠났다. 그가 떠나면서 신촌의 허름한 술집에서 말한 책이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방랑이었다. 그때가 인도 여행이 유행할 때였기에 그도 덩달아 인도 바람이 들었다. 한 달 정도 인도에 머물다 온 이후 그는 티베트를 여행했는데 그때도 후지와라 신야의 책을 읽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서점에 인도에 관한 책이 무척 많이 깔려 있었다. 여행서는 물론이고 의 책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그때 설레는 마음으로 읽었던 후지와라 신야의 책을 다시 읽었다. 두 권짜리를 한 권으로 묶어 다소 두껍고 무거운 책이다. 그때도 꽤나 감동적이었는데 다시 읽어도 역시 그의 사진과 글은 시적이면서 몽환적이다. ..

네줄 冊 2018.12.27

어느 휴일, 고갈산을 바라보며 - 전성호

어느 휴일, 고갈산을 바라보며 - 전성호 내 야윈 살을 만지면, 문득 죽음이란 낡은 단어가 몸의 골짜기로 침잠해 있다 한겨울 빈 들에 나와 있는 것처럼 내 귀때기를 스치는 스산한 바람이 차다 내 생의 뒷마당에는 집요한 욕망의 빈 보따리만 뒹굴고 한덩이 얼음 같은 꿈만 안고 있다 내 존재가 저 고갈산 중턱에 떠밀려 지상의 세계를 벗어나는 안개를 따라가고 있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도 한낱 품 갚음 죽는다는 것은 환송이다 넋의 비곗덩이 남기고 죽살이 굴레를 훌훌 털고 떠나는 남자 증증 하늘로 오르는 안개여! 우리 언제 저 은빛 날개처럼 연습 없이 이 섧은 지상을 떠날 것이다 *시집, 캄캄한 날개를 위하여, 창비 바람 쉬어가는 벌판에서 - 전성호 –미얀마, 바간 가는 길 검붉은 탑들이 하늘 떠받치고 있다 휑한 푸..

한줄 詩 2018.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