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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그 뻔한 것에 대해 - 차주일

그리움, 그 뻔한 것에 대해 - 차주일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멈춰 서면 뒤돌아보는 시야만큼 공간이 생겨난다. 부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만큼 팽창하는 영토.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유배지. 외곽을 허물어놓고도 자신만 탈출하지 못하는 누구도 입장할 수 없는 성역(聖域)에 과거로 얼굴을 펼치고 미래로 표정을 그리는 사람은 쉬이 눈에 띄었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내 마지막 표정이 생각나지 않아 내 얼굴에 무표정이 머문다. 무표정이 진심이라는 풍문이 떠돈다. *시집, 어떤 새는 모음으로만 운다, 포지션 도착하는 소실점 - 차주일 무화과 진 가지 끝은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이다. 투신은 흔적을 남겨 누군가에게 질문한다. 꽃을 보지 못하고 떠난 이 사람은 꽃이란 아주 먼 곳에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발로는 갈 ..

한줄 詩 2018.12.30

잘 가라 이 년, 그 연

옛날 겨울이 되면 연을 날렸지. 바람이 불어야 더 좋은 날,, 친구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근사한 방패연이었다. 나는 스스로 만들었다. 조금은 조악하지만 그래도 신났다. 방패연은 만들기 어려워 포기하고 가오리연이었다. 손이 시리면 한 손을 번갈아 호주머니에 넣지만 바람이 센 날에는 그마저 쉽지 않았다. 자칫 얼레가 풀리거나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짚가리가 쌓인 동네 모퉁이에서 팽팽한 연줄에 달린 가오리연이 높이 날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내 친구 몽연이가 옆에서 더욱 신나게 소릴 질렀다. 나보다 두 살 많은 몽연이 오빠는 동생을 때렸다. 멀리 떠났다. 몽연이도 떠났다. 연도 연줄을 끊고 멀리 떠났다. 때론 연을 찾으러 가기도 했으나 이미 논바닥에 처박혀 찢어진 연은 쓸모가 없었다. 늘 보내는 해지만..

열줄 哀 2018.12.30

무의미를 위해 복무하다 - 장시우

무의미를 위해 복무하다 - 장시우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비애는 육체를 잠식한다 무의미는 인생을 잠식한다 축복처럼 축복처럼 축복처럼 잠식하고 잠식하고 잠식한다 영혼의 집, 육체의 집, 인생의 집 집으로 가득 차 부어 오른 내 불쌍한 배를 들여다보면 보인다 집집마다 방방마다 눈먼 누에들의 스멀거림 갉고 뜯기고 삼키는 저 몰두하는 맹목의 입들 남아나는 것이 없다, 폐허의 생애 살 수가 없다 살 수가 없어 스스로 문 닫고, 못질하고 들어앉아 묘비에 기록하였으니 마지막까지 인생이 눈물겹더라 *시집, 중국산 우울가방, 하늘연못 미라 앞에서 묻는다 - 장시우 옷이라는 거 믿을 게 못 되네 투루판의 아스티나 옛 무덤 가서 무덤 속 누워 있는 미라 만나 보니 옷이라는 거 주인은 생각도 않고 지 먼저 썩어 버려 주인은 ..

한줄 詩 2018.12.29

흔적에 대하여 - 임동확

흔적에 대하여 - 임동확 어느 케케묵은 책갈피 72페이지와 73페이지 사이에 희미한 커피 얼룩은 언제, 무슨 일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는지 흔적은 그저 흔적일 뿐이라는 듯 오히려 필생의 비밀처럼 아득하고 난감해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느닷없이 엎질러진 커피에 민망해 하며 서로의 옷에 튄 커피 방울을 털어내고 필시 바닥에 떨어져 깨진 커피 잔을 쓸어내고 탁자를 물걸레로 훔쳐냈을 소란함도, 분주함도 없다 그러니까 그 커피 향이 뜻밖에 가져다준 선물은 이미 존재했던 사실의 확인이 아닐지 모른다 어디까지나 그 어리둥절한 거리만큼 어둡고 신비로운 너의 육체 같은 전망에 대한 탐험이며, 매번 다른 미래의 책장을 다시 처음부터 읽어가는 일 낡은 영화 필름처럼 지나가 버린 사태들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재상영하..

한줄 詩 2018.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