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겨울 - 김종해
봄이 오기 전에 나는 안경을 샀다
겨울 동안 세상은 근시가 되어 있었지만
바늘귀도 볼 수 없는 내 눈을 탓하며
나는 가급적 촛점을 풀고 편하게 지냈다
무사안일주의의 세상을 껴안고
참으로 행복하게 지냈다.
싸우지 않는 사람의 칼,
무저항주의의 따뜻한 난로 곁에서
보이는 세상을
보이지 않는 세상과 맞바꾸었다.
우리나라 겨울 날씨와
시력의 상관 관계를 역설하며
안과의사들마저
나의 시력이 지극히 정상적이라 했지만,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자의 월동,
겨울은 가지 않고,
세상은 안경알의 수증기
그렇다,
봄이 오기 전까지 나는 안경을 써야 한다.
풀잎이 돋는 것을 보며,
이젠 눈물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
*시집, 바람보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문학세계사
항해일지. 21 - 김종해
-아버지와 도끼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
나는 도끼로 패주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민중시를 쓰지 못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한낱 장사아치의 계산기가
더 소중스럽지만
민중민중민중민중민중민중
말의 남발보다
땀 흘려 일하는 개인주의를 더 사랑한다.
절망과 눈물과 구호를 단지 속에 묻어 놓고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
나는 도끼로 패주고 싶은 것이 있다.
사십년 전,
아버지가 쥔 도끼자루는 녹슬었지만
밑바닥을 살았던 아버지의 적개심이
이 가을에
문득 내 손에도 쥐어져 있구나.
*독자를 위하여
시인 선서
시인이여.
절실하지 않고, 원하지 않거든 쓰지 말라.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으면 구하지 말라.
스스로 안에서 차오르지 않고 넘치지 않으면 쓰지 말라.
물흐르듯 바람불듯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을 좇아가라.
가지지 않고 있지도 않은 것을 다듬지 말라.
세상의 어느 곳에서 그대 시를 주문하더라도 그대의 절실성과 내통하지 않으면 응하지 말라.
그 주문에 의하여 시인이 시를 쓰고 시 배달을 한들 그것은 이미 곧 썩을 지푸라기 詩이며, 거짓말시가 아니냐.
시인이여, 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의 심연을 거치고 그대의 혼에 인각된 말씀이거늘, 치열한 장인의식 없이는 쓰지 말라. 장인(匠人)의 단련을 거치지 않은, 얼마나 많은 가짜시가 들끓는는가를 생각하라.
시인이여,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그대는 외로운 이, 가난한 이, 그늘진 이, 핍박받는 이, 영원 쪽에 서서 일하는 이의 맹우여야 한다.
김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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