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생물 시간 - 김주대

마루안 2019. 1. 2. 19:40

 

 

생물 시간 - 김주대

 

 

너무 먼 어제로부터 여기까지 와서

돌아누울 때마다 문신처럼 새겨지는 기억들 앞에 속수무책이다

내가 본 것을 사람들도 보았을까

내가 본 것 때문에 다른 내가 되어서

내가 들은 것 때문에 다른 노래를 부르며

열꽃 피는 몸 안에 수장되려나

육신의 병과 함께 시간의 깊이에 도달하려던 어리석음이

갈 수 없는 곳에 닿을 때마다 흘러나오는 신음

뒤척이면 불같은 열 번진다

평화로운 애비가 되지 못한 죄로 악몽을 꾸다

깨어 젖은 몸을 내려다본다

강가 나뭇가지에 걸린 시신처럼 부은 몸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이 시반을 만든다

손끝이 떨린다

너무 먼 어제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기억을 입은 몸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오랜 시간까지 내려가

식은땀 쪽으로 돌아눕는다

 

 

*시집,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 현대시학사

 

 

 

 

 

 

04시 30분 - 김주대

 

 

얇은 커튼 걷듯 유리벽 밀고 들어와

비가 내실에 가득하다

살러 들어온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젖다 잠이 깬다

불을 켜지 않으면 빗소리는 길에 눕는 것처럼 잘 내린다

표절하지 않은 새벽이 오래 전부터 있어

누워서 너를 느끼는 것처럼 빠져들 때

냉장고가 때마침 돌아가고 엄지손가락이 아프다

비는 소리로만 살겠다는 듯

시계와 함께 벽의 순간에 걸린다

귀가 커지며 열이 빠져나간다

비를 찾는 눈이 어둠을 더듬어 소곤거린다

비는 고이지 않고 끊임없이 내실에 내린다

배가 고파서 머리를 깎으러 갔다 온 저녁에는

두 달 전으로 돌아가 가벼웠는데

1센티미터 정도 과거에서 잠이 들었을 때 오기 시작한 비

나를 닫고 창문이 닫혀

춥지 않게 비를 덮고 잔 모양이다

스스로를 믿지 않아도 누군가를 채우려고 하는 것처럼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소곤거리며

내실에 동거하는 비

잠만 적셔놓고 떠나지도 못하는

 

 

 

 

*시인의 말

 

그림자가 괴물처럼 길어지는 오후는

살 속에 있던 내가

살 밖으로 빠져나가는 시간.

오후에 나는 들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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