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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암(住智庵)은 있다 - 한영수

주지암(住智庵)은 있다 - 한영수 은비녀가 없다 백일 비손이 없다 밥 좀 주쇼, 문고리를 흔드는 빨치산의 낮은 목소리가 없다 윗도리가 벗겨진 시신이 없다 속바지 바느질 자국으로 알아본 뭉개진 얼굴이 없다 산딸기의 붉은 빛처럼 주지암은 숨어있나 소풍을 간 곳 초등학교 때 아버지도 양은도시락 허리에 차고 숨차 올랐다는 바래봉 깎아지른 바위 아래 그 무서운 사천왕도 없이 스님마저 어디 가고 바위부처 혼자 골짜기 마을을 품어준 주지암이 없다 표지석의 화살표를 따라 갔는데 삐비 한 줌처럼 봄 소풍 전날 밤의 뒤척임처럼 뒤척이다 엿들은 한숨처럼 희미해졌나 다가선 그만큼 멀어져갔나 흔들리는 촛불이 없다 떨어지는 촛농이 없다 왼손과 오른손을 모은 가슴이 없다 *시집, 꽃의 좌표, 현대시학 꽁초 - 한영수 오늘 낮도 지..

한줄 詩 2019.01.07

꽃의 엘레지 - 이은심

꽃의 엘레지 - 이은심 죽음도가끔 예약날짜를 잘못 알고 젊은 영정 사진을 찾아든다 각자의 슬픔을 들고 칸칸이 헤어지는 복도 끝 검은 리본의 꽃들이 빙 둘러앉아 잇몸을 드러낸다 꽃의 결점은 지나치게 잘 웃는다는 것이다 심드렁할 때는 더욱 시커먼 목울대가 보이도록 웃는다는 것이다 조문객들이 쌓아놓은 국화 옆에서 영정도 싱글벙글 웃고 계단 아래 만장 휘날리는 꽃길 조용한 뒷자리 한 울음을 찾기까지 배웅을 받으러 가야 하는 장례식장 특1호실 기가 막혀 이틀 사흘 죽을 때까지 웃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그것이 또 애절한 울음이어서 왁자하게 웃으면서 시드는 당황하는 상처의 벌어진 틈 *시집, 바닥의 권력, 황금알 눈사람 영정 - 이은심 골짜기 그늘과 산등성이를 두루 거쳐 언니들이 왔다 자드락밭에 서 있기만 해도 어..

한줄 詩 2019.01.06

햇빛 이자 - 박숙경

햇빛 이자 - 박숙경 새벽이 와서 또 그렇게 달아나기를 몇 번쯤 하였을까 저, 읽혀지지 않는 표정과 아무 일 없다는 듯 반듯한 아침의 자세에 얼마의 불만이 필요했다 가끔, 흐트러지고 싶다는 꿈이 생기곤 했다 꿈과 불안이 함께 자라났다 딱 한 번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빛바랜 시간 위에 손을 얹는다 생의 하이라이트가 어둡게 지나갔다 새로이 켜지는 종소리에 귀 기울이는 오후 아주 나쁨의 미세먼지들이 귓불 주변에 둘러앉아 뿌옇게 두런거린다 익숙하지 않는 과도기 내가 아닌 모든 것들을 나머지라 했던 과거를 삭제하기로 했다 어제 버렸던 햇빛이 돌아오는 시간까지 밀린 원리금을 준비해야 한다 창 너머의 겨울 햇살은 층층이 불어난 이자처럼 과장 없이 반짝였다 채널을 돌려도 기막힌 승부수와 눈 예보는 없다 *시집, ..

한줄 詩 2019.01.06

여행 - 이진명

여행 - 이진명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는가 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 첫 여자도 첫 키스도 첫 슬픔도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안 돌아오는 여행을 간 것이다 얼마나 눈부신가. 안 돌아오는 것들 다시는 안 돌아오는 한 번 똑딱한 그날의 부엉이 눈 속의 시계점처럼 돌아오지 않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다 그때는 몰랐다 안 돌아오는 첫 밤, 첫 서리 뿌린 날의 새벽 새 떼 그래서 슬픔과 분노의 흔들림이 뭉친 군단이 유리창을 터뜨리고 벗은 산등성을 휘돌며 눈발 흩뿌리던 그것이 흔들리는 자의 빗줄기인 줄은 없었다. 그 이후론 책상도 의자도 걸어 논 외투도 계단도 계단 구석에 세워 둔 우산도 저녁 불빛을 단 차창도 여행을 가서 안 돌아오고 없었다. 없었다. 흔들림이 흔들리지 못하던 많은..

한줄 詩 2019.01.05

너는 너무 멀다 - 김이하

너는 너무 멀다 - 김이하 이 밤 모든 것은 막혔다. 고 그랬다 YTN 뉴스라면 밤새 돌고 돌아 또 그 뉴스를 틀어 주었을 법하지만 나는 그게 지겨워 슬그머니 밤참을 먹는다 희망이 끊어진 길이 두려워 창자 끝에서 욕은 끓어오르고 덮을 뚜껑은 없고 나도 몰래 새는 코피를 손가락 하나, 그거면 충분한 구멍을 휴지를 둘둘 말아 훔치며 아아, 너무도 질긴 밤 내가 너에게 그 말을 했어야 하는데 너를 죽이고 싶다는 그 말을 그러나 그 말은 끝내 술잔 속으로 도르르 구르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걸 너도 알았다 알아 버렸다, 이 생은 너무 낡아 어디 버릴 데도 없다는 걸 너도 알아 버렸다 너도 돌아서며 슬그머니 눈물을 훔쳤을 거라는 걸, 조금은 느끼겠다 우린 그렇다, 1960년대를 걸어온 길은 그렇게 미끈하다 ..

한줄 詩 2019.01.05

고물장수 공 씨 - 백성민

고물장수 공 씨 - 백성민 새벽길을 나서면 졸음 겨운 별들이 낯을 씻기 시작한다. 걸음을 잡는 어둠들은 잠에서 깨지도 않은 채 하품을 하고 머리맡에서 들리던 낮선 여인의 음성은 꿈결처럼 아득하게 들려 왔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아내의 얼굴은 어느 골목길을 해매일까? 습관처럼 삼켜먹는 빵 한 조각과 우유 한 모금이 생목을 불러오고 휘청거리는 햇살을 허리춤에 동여매 본다. 성 임마누엘 (무료 급식소) 앞에는 하루를 살아야 할 목숨들이 남아있는 생의 길이만큼 줄서기를 하고 먼발치에 손수레를 세워놓는 허기진 육신은 꿈결 같은 여인의 한때를 근심한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돌아서는 길. 무릎은 왜 자꾸 무너지는지..... 모진 한숨으로 밤을 새우던 아내의 신 새벽은 빈 손수레를 가득 채우고 골목마다 울리는 공 씨의 가..

한줄 詩 2019.01.05

겨울비에 의한 사설 - 류정환

겨울비에 의한 사설 - 류정환 먼 이야기처럼 지붕을 넘고 문턱을 넘어오는 빗소리. 겨울에 비가 내리면 잠이 오지 않는다. 누가 다녀가는가, 조용한 발소리 열어 볼 수도 없고 열어 보지 않을 수도 없는 문 쪽으로 걸레처럼 풀어진 어둠의 강. 어디쯤에서 솟구치기 위해 우리는 이다지도 흐르고 싶은가. 흘러서 거침없이 물이 되고 싶은가. 강물이여, 속절없이 젖는 도시를 보아라. 물결에 떠밀리고 떠밀린 끝, 벼랑 같은 방마다 쥐똥같이 굳어 가는 눈동자들, 천 갈래로 해매이는 검은 머리카락과 날마다 낮아지는 어깨와 이불을 당겨 덮어도 다 가리지 못하는 벌건 몸뚱아리. 이 불길한 도시에 누가 또 몸을 던니는가, 웅성거리는 창밖 빗소리. 불을 끌 수도 켜 둘 수도 없는 겨울에 비가 내리면 유난히 밤이 길다. *시집, ..

한줄 詩 2019.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