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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불러주는 자장가 - 차주일

나에게 불러주는 자장가 - 차주일 전곡리 석기시대 움막에는 바람의 문이 있다 들어갔으나 열리지 않은 문이 있다 눈 감고 어둠에 주파수를 맞춰 문을 열자 바람 한 덩어리 깨어진다 타제석기 같은 바람이 낮과 밤의 경계를 찔러댄다 짙어지는 노을이 짐승의 비명처럼 진동한다 붉은 고막 까맣게 멈추면 어제가 오늘로 건너갔다는 것 사라진 풍경은 소리로 출산된다 사냥한 짐승을 떠메고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 짐승 가죽 벗기는 소리 눈 감고 들어야 환히 보이는 웃음소리들 얼마나 오랜 동안 허공에 마모된 것인가 소리를 내려놓은 바람의 손이 마제석기처럼 매끄럽다 내 체온의 주파수를 찾아낸 바람이 나를 열고 털 듬성한 아기 가슴을 다독인다 유아치 같은 자음이 묻어나는 젖 빠는 소리와 경음과 격음이 사라진 최초의 자장가가 들린다 ..

한줄 詩 2019.01.27

나는 나다 - 정민

한시는 잘 안 읽다가 요즘 들어 자주 손에 잡는다. 분명 우리 조상이 쓴 시인데도 중국 문자로 썼다는 이유 때문에 기피했는데 그보다 한문 실력이 형편 없기에 누군가 번역해주지 않으면 제대로 맛을 못 느낀 탓이 클 것이다. 예전에 어려운 한자를 해독하기 위해 자전 펴놓고 한 줄씩 읽던 시절도 있었건만 세월은 이렇게 게으름만 쌓이게 했다. 이 책은 제목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제목에 낚였다가 함럄 미달의 허술한 내용을 알고는 도로 내려 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제목으로 배신은 하지 않았다. 저자의 빼어난 해석 능력과 현대적인 한글로 잘 번역을 해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단점이라면 대부분의 인물들이 다른 책에서 많이 다룬 문장가들이라는 거다. 허균, 이용휴, 성대중, 이언진, 이덕무, 박제가, 이..

네줄 冊 2019.01.26

폭설 - 허연

폭설 - 허연 말로 한 모든 것은 죄악이 되고 죄악은 세월 사이로 들어가 화석이 된다는 걸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벼랑에서 마지막으로 웃고 있을 때, 나는 수백 개의 하얀 협곡 너머에 있었습니다. 당신의 웃음이 나의 이유였던 날. 이상하게도 소멸을 생각했습니다. 환희 속에서 생각하는 소멸. 체머리를 흔들었지만 소멸은 도망가지 않고 가까이 있었습니다. 원망하다 세월이 갔습니다. 이제야 묻고 싶습니다. 두렵지는 않았는지. 망해 버린 노래처럼 그렇게 죽어갔던 과거를 당신은 어떻게 견뎌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 나는 오늘도 소멸만 생각합니다. 협곡을 지나온 당신의 마지막 웃음을 폭설 속에서 읽습니다. 왜 당신은 지옥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죽어서 다시 천 년을 살 건가요..

한줄 詩 2019.01.22

우리말의 탄생 - 최경봉

며칠 전에 영화 말모이를 보고 나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요즘 영어에 우리 말이 심하게 오염되고 있다. 아무리 언어란 게 생물과 같아서 시대와 함께 변한다고는 하지만 우리 말을 이렇게 홀대하다가는 조만간 영어 발음을 표기하는 표시 문자로 전락할 것이다. 이런 시대에 이 책은 참 소중하다. 프랑스와 중국이 자기 말이 영어에 오염되는 것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프랑스와 중국이 문화대국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언어란 그 나라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우리 말이 미처 체계화 되지 않았던 일제 강점기 때 우리말 사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기술했다. 이런 책이 다소 지루할 수 있는데 저자의 글솜씨 덕에 아주 흥미롭게 읽힌다. 내가 한국인이고 우리 말이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게 ..

네줄 冊 2019.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