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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이 나는 배 - 서규정

가장 높이 나는 배 - 서규정 진달래가 아름다운 건 순전히 벼랑 때문이라는 것과 이 작은 어선이 빛나는 것은 파도 때문이란 걸 동시에 알았습니다 가파른 것이라야 살맛이 나겠지요 도시 변두리를 전전하던 내 삶이 하도 밋밋하고 팍팍하여서 바다로 나가기로 결심했을 땐 한번도 내린 적 없는 눈이 산동네 언덕배기에 소복소복 내려 쌓여선, 나 어디까지나 비듬을 터는 비듬주의자로서 오늘 아침 파도 6~7m 너무 심심하고 잔잔해 차라리 해일로 불어오렴 내 몸을 걸레처럼 쥐어짜서라도 푸른빛이 다 터져 나오도록 폭풍우로 갈겨다오 이 바다에서 제일로 큰 배보다 가장 높이 뜬 배를 타고 벼랑벼랑 울고 싶으니 *시집, 겨울 수선화, 고요아침 멀리 나는 새는 가지 끝에 앉지 않는다 - 서규정 모처럼 사위가 탁 트이고 사공들의 기..

한줄 詩 2019.02.11

달달한 쓴맛 - 안성덕 시집

이라는 이색적인 제목이 눈길을 끈다. 서울 집중이 유난히 심한 한국이라 지방에서 만들어진 시집이 더욱 반갑다. 모든 시집을 다 사보는 것은 아니지만 모악에서 나오는 시집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다가 확 쏠리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오십대가 되면서 나도 입맛이 변했다. 쳐다보지도 않던 나물 반찬에 젓가락을 부지런히 옮기고 쌉싸름한 맛의 오묘함을 알게 되었다. 시인이 말했던 달달한 쓴맛이란 대체 무슨 맛일까. 지금까지 맛본 적도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맛이다. 그의 대표시로 손색이 없는 시에서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를 절창으로 풀어냈는데 세상살이가 그렇게 명확한 맛으로 구분되어 살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 달달한 쓴맛을 읽으며 소박한 어휘로 풀어 쓴 시맛을 제대로 봤다. 군대 선배 중에..

네줄 冊 2019.02.11

내 친구 영필이

그는 군대 동기다. 다소 어리버리했다. 내가 많이 돕고 궁지에 몰리거나 왕따를 당할 위기에 닥치면 방어막이 되었다. 제대하고 몇 번 만났다. 지방 국립대에 복학한 그와 부나비처럼 방황하던 나와는 달랐다. 제주로 러시아 페째르부르그 영국 런던으로,,,, 내가 떠돌 때도 그는 광주를 지켰다. 이번 여행에서 전화를 했다. 설날 저녁 그가 반색을 하더니 택시를 타고 광주역에 15분 만에 나타났다. 고맙네. 고스톱 치다가 도망쳤어. 술자리에서 그가 카톡을 두어 번 보낸가 싶더니 처남이 왔다. 그도 고스톱 파하자 왔단다. 처남은 초면이다. 그래도 오랜 지인처럼 정겹다. 초면부터 형님이라 부르며 말을 내리란다. 광주의 쓸쓸함. 그러나 정겨운 밤은 깊어간다. 변하지 않은 친구가 고맙다. 그는 여전히 착하다. Loree..

열줄 哀 2019.02.10

숙박계의 현대시사 - 박현수

숙박계의 현대시사 - 박현수 화양리에는 여관 아줌마만 모르는 현대시사가 있었다 여관에서, 아니 여인숙에서 하룻밤 자는 데도 이름과 주소를 기록하여야 했던 궁색한 실록의 시절 뒤통수 치던 출석부를 닮았던 검은 표지의 명부에 그 해 여름 몇 줄씩 사초를 필사했다 시선을 둘 데 없어 안절부절못하는 여자를 등지고 신경림, 최승자를 적고 욕실 속 샤워하는 그림자를 짐작하며 정현종, 김승희를 갈기고 내 어깨를 잡고 낄낄대는 여자의 교정을 받아 황지우, 김혜순을 기입하기도 했는데 막상 숙박계를 펼치면 시보다 더 어려운 이름들에 커플은 늘 바뀌었지만 시들만은 제 이름을 버리지 못하고 계절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이성복, 김남주를 쓰고 보니 너무 심하다 싶어 고친 저녁도 있었다 김지하를 쓰지 못한 소심한 오후도 빠트려선 안..

한줄 詩 2019.02.10

환멸 - 류근

환멸 - 류근 네게 보여줄 수 없다 그곳 풀담장 꽃 그림자 휘어진 문패 거기에 없다 문을 나서면 즈믄즈믄 별들이 계단을 쌓고 날마다 누구의 고통도 아닌 음악이 이웃들을 일으킨다 연기를 피우지 않는 것은 그러니까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예의를 바치는 일 이슬은 더 높은 하늘에서 내리고 흐르지 않는 시간인데도 사람이 자라서 물가의 깨끗한 말씀들을 데리고 온다 무지개 따위 지는 꽃 청춘의 한때 따위 거기에 없다 다만 슬픔의 습관을 치유하기 위해 가장 지혜로운 구름들을 베풀어놓았을 뿐 멈춰 서서 중얼거리는 사람에겐 추억과 더딘 걸음의 연인들에겐 비와 언덕을 내어주고 아무것도 필요 없어진 하루를 위해 돌 위의 밝은 잠이 남겨진다 그러니까 등불을 매달지 않아도 올 사람 오고 가슴 같은 거 쓰지 않아도 편지가 ..

한줄 詩 2019.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