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 허연
말로 한 모든 것은 죄악이 되고 죄악은 세월 사이로 들어가 화석이 된다는 걸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벼랑에서 마지막으로 웃고 있을 때, 나는 수백 개의 하얀 협곡 너머에 있었습니다.
당신의 웃음이 나의 이유였던 날. 이상하게도 소멸을 생각했습니다. 환희 속에서 생각하는 소멸. 체머리를 흔들었지만 소멸은 도망가지 않고 가까이 있었습니다.
원망하다 세월이 갔습니다.
이제야 묻고 싶습니다. 두렵지는 않았는지. 망해 버린 노래처럼 그렇게 죽어갔던 과거를 당신은 어떻게 견뎌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 나는 오늘도 소멸만 생각합니다. 협곡을 지나온 당신의 마지막 웃음을 폭설 속에서 읽습니다. 왜 당신은 지옥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죽어서 다시 천 년을 살 건가요. 당신은?
*시집, 오십 미터, 문학과지성
만두 쟁반 - 허연
이상하게 난 만두 앞에서 약하다. 일찍 떠나보낸 어머니도, 위태로웠지만 따뜻했던 어린 시절도, 제 살길 찾아 흩어지기 전 형제들의 모습도, 줄지어 쟁반 위에 놓여 있던 만두로 남아 있다.
어쩌면 인생은 만두다. 파릇한 청춘과 짜내도 계속 나오는 땀이나 눈물, 지친 살과 뼈, 거기에 기억까지 넣고 버무리는 만두는 인생을 닮았다.
하얀 만두피 속에 태생이 다른 것들을 슬쩍 감춰 놓은 것도 생을 닮았다. 잘게 부수어지고 갈리고 결국은 뜨거워져야 서로를 이해하는 만두는 생이다.
뒤엉켜 뜨거워지기 전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뜨거워진 순간 출신을 묻지 않고 목을 타고 넘어가는 만두는 인생을 닮았다.
# 허연 시인은 1966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가 있다. 현대문학상, 시작작품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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