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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 - 김주대

노숙 - 김주대 공원 나무탁자 위에 버려진 캔을 사내의 팔꿈치가 슬며시, 넘어지지 않게 밀어본다 묵직하다 옆 사람을 힐끗 쳐다본 사내는 낚아채듯 캔을 들어 먹이 문 길고양이처럼 재빨리 자리를 옮긴다 나무 그늘 아래서 목을 뒤로 활짝 젖히고 시커멓게 열린 목구멍 안으로 캔을 기울이자 남은 음료가 질금질금 쏟아진다 울대뼈가 몇번 꿈틀거린 후 길게 내민 허연 혓바닥 위로 캔 속의 마지막 한 방울이 똑, 떨어진다 빈 캔의 둘레를 핥으며 자리로 돌아온 사내의 때 묻은 팔꿈치가 얌전한 고양이처럼 탁자 위에 앉아 다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시집, 그리움의 넓이, 창비 한 끼 - 김주대 무릎이 많이도 튀어나온 때에 전 바지의 사내가 마른 명태 같은 팔로 몸의 추위를 감싸고 표정 없이 걷다가 시장 입구 버려진 사과 앞에..

한줄 詩 2019.01.31

낭만적 동결(凍結) - 전형철

낭만적 동결(凍結) - 전형철 젖은 그늘 아래서 천궁 귀퉁이에 박힌 얼음 조각을 바라본다 종일 아이들이 헤집어 놓은 운동장에 흔들리던 바람의 입자들이 한순간 지상으로 쏟아져 내릴 때 우리들의 시간은 동공으로 매몰된다 송곳 모양을 한 짐승들은 사방의 결계 속에 차고 고독하게 굳어 간다 참으로 오랜 세월 달과 별을 바라보다 생의 예언과 죽음의 좌표를 읽어 낼 때 저녁의 소리를 떠올린다 어둠의 매몰과 빛의 질주 낮밤의 얼굴, 살아갈 나와 살처분된 어제로부터의 나 그물코를 깁듯 절망과 고요의 흔적이 가슴께를 뚫고 들고 난다 죽음은 연대와 거리가 먼 행성의 이름이다 *시집, 고요가 아니다, 천년의시작 분열의 율법 - 전형철 부장된 동검이나 거울에 쌓인 먼지의 막막한 시간 보낸 것과 남은 것의 틈 길은 반투명 유리..

한줄 詩 2019.01.30

별까지 깨 귀뚜라미 소릴 듣는 밤 - 한명희

별까지 깨 귀뚜라미 소릴 듣는 밤 - 한명희 피멍이다 떨어지면 끝장인 나무에 붙어 바둥거리다 단풍 든 낙엽들 바닥에는 한 방울 피도 보이지 않는데 머리를 쿡쿡 쥐어박는다 바닥으로 패대기친다 매달리고 악을 써봐도 결실 없는 내 가을 속으로 묘목처럼 무럭무럭 자라야 할 자식들 내일은 또 어느 구조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바둥거려야 하는지 애써 가둬두고 묶어두려 해도 재채기처럼 튀어나오는 이런저런 생각들 어느 구름 속을 떠돌다 내게로 온 독감인지 툇마루까지 튀어나온 잠은 먼데 사막에라도 든 것처럼 고요한 집엔 흔들어대면 와르르 떨어질 것 같은 별들뿐 바람귀에 붙어 가끔씩 뒤척이는 낙엽과 귀뚜라미 그 숨차오는 소리뿐 *시집, 마이너리거, 지혜 브라보, 파고다공원 - 한명희 어미고양이 새끼 둘을 거느린 검은고양이..

한줄 詩 2019.01.30

각기 걸어가고 있는 - 최준

각기 걸어가고 있는 - 최준 개 한 마리가 걸어가고 있다 저 개는 어디서부터 걸어오기 시작했는가 무엇 때문에 걸어오고 있는 것인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오늘 아침 끼니는 거르지 않았는가 했다면 무엇으로 배 채웠는가 점심은 뭘로 때울 것인가 어두워지면 여관에라도 들 것인가 노숙할 것인가 영영 혼자일 것인가 동행을 만날 것인가 지나온 길을 돌아 볼 것인가 가끔 지난 시절 그리워할 것인가 뛰어가기도 하고 포복자세로 가기도 할 것인가 길을 잃어버리고 길 아닌 곳으로 접어드는 경우도 있을 것인가 후회할 것인가 굶기를 밥먹듯 할 것인가 구걸도 해볼 것인가 차라리 길에서 아름답게 죽을 것인가 고심에 찬 개가 가고 있다 저마다의 심중대로 의지대로 한 마리의 무수한 개들이 각기 걸어가고 있다 *시집, 개, 세계사 이런 길..

한줄 詩 2019.01.29

마르셀 뒤샹 전시회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에만 있던 시절엔 미술관 가려면 큰 맘을 먹어야 했다. 경복궁 옆에 서울관이 생긴 이후로 미술관 나들이가 훨씬 쉬워졌다. 가끔 인사동을 걷다 내처 현대미술관까지 들르는 나의 도심 산책 코스이기도 하다. 한국 최초로 마르셀 뒤샹 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학창시절 미술 선생님이 들려줬던 서양미술의 소소한 뒷얘기가 참 흥미로웠다. 로트렉, 모들리아니, 뭉크, 고흐, 고갱 등, 유명 작가들의 예술세계와 사생활까지 참 재밌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마르셀 뒤샹의 소변기 얘기를 들었다. 당시의 뒤샹이 전시품을 철거당하는 거부감이 있었듯이 미술 선생님도 어떻게 변기가 예술이 될 수 있는지를 아주 어렵게(?) 설명을 했다. 교실 뒤쪽의 불량기 있는 몇몇 친구들은 만화책 넘기느라 정신..

여덟 通 2019.01.29

도심 뒷골목의 도반

시대가 변해서 요즘 탁발을 하는 스님은 없다. 어릴 적 탁발을 히는 스님이 동네에 오면 철부지 개구장이들은 스님을 놀렸다. 중중 까까중 동냥 하러 왔다네 뭐 이런 노래와 함께 스님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놀렸다. 부끄럽지만 나도 그 일행 중 하나였다. 당시의 스님 심정은 어땠을까. 탁발을 하나의 수행으로 여기 듯이 개구장이들 놀림도 수행 과정에 포함 된다고 생각했을까. 눈물 많은 중년의 남자가 서울 도심 뒷골목에서 스님을 만났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나란히 걷는 모습이 참 좋았다. 저런 것을 도반이라 했던가. 지금도 나는 파르스름하게 깎은 스님의 머리를 보면 서늘함이 지나간다. 평범한 길을 포기하고 걷는 수행자의 길은 행복한가. 그렇게 믿는다. 저렇게 같은 길을 걷는 도반이 있으니까.

다섯 景 2019.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