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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루 - 윤석산

어느 하루 - 尹錫山 하루 종일 전화가 두 번 울렸다. 한 번은 잘못 온 것이고 다른 한 번은 돈을 꾸어주겠다는 전화였다. 세상의 그 많은 전화번호 중에 어떻게 이 번호가 선택되어 잘못 돌려진 것일까. 무작위로 다이얼을 돌리면서 돈을 대출해주겠다는 전화라도 이렇게 이르니 살아 있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담보가 아닌가 잠시 착각을 했다. 먹통이 다 된 귀, 그래도 조금은 호사 아닌 호사를 한 오늘 살아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서글픈 날이었다. *윤석산 시집, 절개지, 도훈출판사 노숙, 몽유의 - 윤석산 아직 다 비우지 못한 소주 그 나머지, 반병만큼의 생 잠든 그의 곁 위태롭게 서 있다. 세상이 모두 자신의 것인, 버려질 유산이 전 재산인 그. 아직 버리지 못한 세상 속 웅크린 채 잠들어 있다. 단 한 ..

한줄 詩 2019.04.05

굳은살을 벗기며 - 김이하

굳은살을 벗기며 - 김이하 왠지 삶이 무겁다고 새에게 말했을 때 새는 저 혼자 날아갔다 그리고 쓸쓸한 밤과 겨울 나는 부르튼 발을 끌고 가까스로 방에 몸을 들였으나 더욱 막막한 추위가 온몸을 흔들었다 좀체 들 수 없는 눅눅한 잠 뜬눈으로 새벽이 왔겠다 아아, 가려운 저 발바닥을 그곳 두텁게 들어앉은 더께를 뭉텅 벗겨 내고 그래도 왠지 삶이 무겁다고 발에게 말했을 때 발은 비로소, 내가 무거운 까닭이라고 못생긴 웃음을 주었다 *시집, 눈물에 금이 갔다, 도화 저쪽에서 이쪽으로 - 김이하 새들.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다 내 눈길에 막혀 나뭇가지 밑으로 사라진다 새를 잃은 나뭇가지는 지난해 못다 떨군 잎자루를 서둘러 털어낸다 다시 시치미를 떼는 가지들 아마 꽃을 보았을까 홍매, 청매, 산수유 이제 막 기지개..

한줄 詩 2019.04.05

바닷가의 이민들 - 손월언

바닷가의 이민들 - 손월언 날품 없는 이민의 하루는 허무하다 이국의 말, 길들, 사람들 속에서 마음은 종잡히지 않고 몸들만 볕바른 곳을 찾았다 그러나 의미로 가득 찬 조국은 슬픈 것 조국이란 전쟁중이거나 굶주림중이거나 둘 중에 하나지 늙수그레한 구렛나룻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어디로부터 흘러왔는지 막혀서 돌아왔는지 하루를 잘 견디는지 그래도 이야기는 쓸쓸한 꽃으로 핀다 낯선 땅에 증명도 없이 둘이 먼저 일어났지만 바람 불고 날은 저무니 몸마저도 갈 곳이 마땅찮다 저만치 떨어진 벤치 앞에서 서성이는데 나는 묻지도 못했지 식구들은 어디 있어요 식구들은..... *시집. 마르세유에서 기다린다, 문학동네 고향 바다 - 손월언 세상 사람들이 아직은 옷감에 물들이지 못한 파란색 바다 세상 사람들이 아직은 보석으로 ..

한줄 詩 2019.04.05

배후 - 김주대

배후 - 김주대 덥석 물었다가 뱉은 마른 풀 같은 외할머니의 젖과 설탕물 넘어가는 목구멍에서 새어나오던 울음소리가 몸의 바닥에서 올라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다 목숨 깊숙이 쟁여졌던 배고픔이 부유물처럼 떠오르는 밤에도 엄마는 오지 않았고 외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개구리 같은 손주의 배만 하염없이 쓰다듬었다고 한다 지구가 태양을 마흔다섯바퀴나 돌고 파도가 해안을 천만번 때린 시간이 지나도 눈물은 기억의 바다에서 올라와 주린 눈가를 적신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오래전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젖이 마른 풀처럼 씹힌다 기억은 내장과 근육과 뼈에 숨어 있다가 배고플 때 틀림없이 떠오른다 그러나 나는 장담한다, 내가 온몸에 번지는 눈물의 냄새로 한번도 어른이었던 적이 없음을 오로지 배고파서 ..

한줄 詩 2019.04.05

바람이 부르는 것들

바람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부정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람이 났다. 바람을 맞았다. 바람이 들었다. 제주 올레길에는 시종 바람이 불었다. 걷는 동안 좋은 뜻으로 바람과 함께 했다. 맞기도 하고 들기도 하고, 호기심에 바람이 나면 주체할 수 없이 공부가 된다. 이 풍경들은 바람이 잠시 쉴 때 담은 것이다. 이럴 때를 바람이 잔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바람 잘 날 없던 내 인생에 잠시 평화가 깃들 때도 지금이다. 내 마음에서 바람이 자고 있다.

다섯 景 2019.04.03

기침 - 정영효

기침 - 정영효 예감에 대해 묻는다면 대답 대신 기침을 할 수도 있다 기다려도 오지 않고 오고 나면 지나칠 수 없는 기침은 내가 따르지 못하는 순서 앞뒤를 감당할 수 없는 조짐처럼 나와 무관했지만 내게서 시작되는 짧은 휴식이거나 오래된 피로 같은 것 모든 골목이 빛을 닫고 무너질 때 저녁이 무성한 잡념들을 거두면 나는 견고해지는 어둠 속에서 기침을 기다린다 아니 예감을 준비하며 나에 대한 태도를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기침은 끝이 아닌 계속의 형식 죽어가는 이의 기침에선 다른 생이 태어나고 기침이 지나간 자리에는 희미한 파문이 남을 수도 있다 가령 그의 유언은 기침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기록하지 못했다 사라지면 돌아오는 고요 같은 어떤 생략과 반복을 느꼈을 뿐 그것이 윤회나 이생에 대한 믿음이었다..

한줄 詩 2019.04.03

김석영 개인전 - 空卽是色

인사동에 갔다가 포스터의 강렬함에 이끌려 들어간 전시였다. 2년 전인가. 그의 개인전을 처음 봤었다. 대부분의 그림이 원색적인 데다 유독 말 그림을 많이 그리는 작가다. 그때도 그랬다. 22회 전시면 매년 전시회를 했다해도 20년이 넘는 대단한 작품 활동이다. 그림 시장에서 그만큼 잘 나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긴 그의 그림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친다. 강렬한 색상에다 거친 붓놀림이 더욱 생동감이 살아있다. 그의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 어릴 적 봤던 무당옷이 생각났다. 무당이 신이 내리면 모르는 누군가가 묻어 둔 무구(巫具)를 찾아 낸다고 한다. 찾은 무구로 인해 신을 받은 무당은 자신의 무구를 어딘가에 묻는다. 나중에 신내림을 받게 될 무당 또한 그 무구를 찾아내야만 무당이 될 수 ..

여덟 通 2019.04.02

깨우고 싶지 않은 잠 - 박정원

깨우고 싶지 않은 잠 - 박정원 수없이 거느렸던 이파리들을 하룻밤 사이 단 한 장도 남김없이 내려놓은 은행나무 잎잎이 갉아먹던 소리들을 내려놓고 물들이던 색깔들도 내려놓고 보채던 식탐도 내려놓고 끼리끼리 나누던 온기도 내려놓고 늙은 두 내외만 기거하는 초가집처럼 때꾼한데 그것들은 하룻밤 사이가 아니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내려놓을 채비를 하고 있었음을 나뭇가지와 나뭇가지가 부딪히는 신음소리를 듣고 뒤늦게 안다 모처럼 서울에서 내려와 곤히 잠든 딸아이 방에 오도카니 앉아 사위될 애가 만들었다는 청첩장을 고요히 꺼내 읽으며 *시집, 뼈 없는 뼈, 종려나무 마지막 힘 - 박정원 하룻밤 사이 일제히 지고 만 은행잎들 방금 칠해놓은 듯 온통 노오란, 샛노랗다고 말했지만 결코 샛노랗지만은 않은 ..

한줄 詩 2019.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