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목련 - 서규정
깊은 산 속, 나무꾼의 딸과 숯장수의 아들이 물 길러 와
계곡에서 나눈 수증기 자욱한 이야기 들어나 보셨는가
사랑 그 부끄러움이 너무 커
누구 누구 위에 숨었는지, 누가 누굴 안고 돌았는지
그냥 그대로 몸이 굳어도 될 그 둘을 갈라놓은 건
땅이 쩍 갈라지는 지진이었다네
넋을 놓고 살던 처녀는 한 몸에 머리가 둘인 아이를 낳자
머리 하나가 나머지를 살리려 젖을 물지 않았다네
본능인 거지 同體大悲
가야 한다, 너를 놓으러
가지 마 가지 마 죽어서도 같이 붙어살아
꼭 그만큼의 이해와 색깔을 보듬어 안고
우리 동네 우물을 빙빙 돌듯 자목련 한 그루 뜀을 뛰며 핀다
*시집, 참 잘 익은 무릎, 신생
손님 - 서규정
키가 한 뼘도 안 되는 팬지꽃에게도 손님이 있다
먼 들녘을 훑고 오는 천혜의 햇빛과 바람만 아니라
막 떠나간 기차역마냥 고요를 채워줄
잔잔한 손님
부전나비다
끼리를 알아본다는 것처럼 아픈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나플나플 같이 보듬고 춤춘다
부빈다는 건 숨이 숨을 부른다는 것
한 생을 기다린 님이 눈앞에 환하게 서려 있듯
스민지도 모르게 스민 슬픔
팬지꽃에겐 기다림의 속도로 새겨진 나비문양이 있다
한없이 가볍다는 건, 지독한 사랑이 기차처럼 울고 간 것이다
# 서규정 시인은 1949년 전북 완주 출생으로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황야의 정거장>, <하체의 고향>, <직녀에게>, <겨울 수선화>, <참 잘 익은 무릎>,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다다> 등이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우고 싶지 않은 잠 - 박정원 (0) | 2019.04.02 |
---|---|
고비 - 박숙경 (0) | 2019.04.01 |
풀리는, 손 - 이명우 (0) | 2019.04.01 |
그해 봄, 노을 속으로 몸을 던진 사랑이여 - 황원교 (0) | 2019.03.31 |
보리밭에서 - 장정일 (0) | 2019.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