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자목련 - 서규정

마루안 2019. 4. 1. 21:52

 

 

자목련 - 서규정

 

 

깊은 산 속, 나무꾼의 딸과 숯장수의 아들이 물 길러 와

계곡에서 나눈 수증기 자욱한 이야기 들어나 보셨는가

사랑 그 부끄러움이 너무 커

누구 누구 위에 숨었는지, 누가 누굴 안고 돌았는지

그냥 그대로 몸이 굳어도 될 그 둘을 갈라놓은 건

땅이 쩍 갈라지는 지진이었다네

넋을 놓고 살던 처녀는 한 몸에 머리가 둘인 아이를 낳자

 

머리 하나가 나머지를 살리려 젖을 물지 않았다네

본능인 거지 同體大悲

 

가야 한다, 너를 놓으러

 

가지 마 가지 마 죽어서도 같이 붙어살아

꼭 그만큼의 이해와 색깔을 보듬어 안고

우리 동네 우물을 빙빙 돌듯 자목련 한 그루 뜀을 뛰며 핀다

 

 

*시집, 참 잘 익은 무릎, 신생

 

 

 

 

 

 

손님 - 서규정


키가 한 뼘도 안 되는 팬지꽃에게도 손님이 있다
먼 들녘을 훑고 오는 천혜의 햇빛과 바람만 아니라
막 떠나간 기차역마냥 고요를 채워줄
잔잔한 손님
부전나비다

끼리를 알아본다는 것처럼 아픈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나플나플 같이 보듬고 춤춘다
부빈다는 건 숨이 숨을 부른다는 것
한 생을 기다린 님이 눈앞에 환하게 서려 있듯
스민지도 모르게 스민 슬픔
팬지꽃에겐 기다림의 속도로 새겨진 나비문양이 있다

한없이 가볍다는 건, 지독한 사랑이 기차처럼 울고 간 것이다

 

 

 

 

# 서규정 시인은 1949년 전북 완주 출생으로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황야의 정거장>, <하체의 고향>, <직녀에게>, <겨울 수선화>, <참 잘 익은 무릎>,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다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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