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자세 - 김정수 속을 꺼내 널자 환멸이 올라왔다 주춤주춤 담장 밖 맴돌던 손이 구름 속을 헤집어 꽃의 모가지를 낚아챘다 갇혀 있던 물 번져 길에 방화범을 풀어놓았다 탐스러운 한기(寒氣)로 겨울을 버틴 덩굴장미가 와락, 노란 혀를 내밀었다 트럭이 개처럼 짖으며 달아났다 바람이 덜컹거리는 짐을 채소와 과일로 구분하곤 굴러떨어졌다 창백한 뺨이 속도의 기색을 살피고 사라지자 꽃병의 눈금이 달로 기울었다 새로운 종(種)으로 태어난 덩굴장미가 시간 속에 앉아 귀를 물들였다 익숙하지만 그대로인 꽃병이 꽃의 자세를 일으켜 세웠다 부끄러운 감정이 뒤에서 서성거렸다 물을 끌어당기는 것은 조금 진실을 닮았다 오랜된 말이 다 익었다 *시집/ 홀연, 선잠/ 천년의시작 환청 - 김정수 목발에 몸 기댄 늦봄 차가운 방이 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