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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자세 - 김정수

꽃의 자세 - 김정수 속을 꺼내 널자 환멸이 올라왔다 주춤주춤 담장 밖 맴돌던 손이 구름 속을 헤집어 꽃의 모가지를 낚아챘다 갇혀 있던 물 번져 길에 방화범을 풀어놓았다 탐스러운 한기(寒氣)로 겨울을 버틴 덩굴장미가 와락, 노란 혀를 내밀었다 트럭이 개처럼 짖으며 달아났다 바람이 덜컹거리는 짐을 채소와 과일로 구분하곤 굴러떨어졌다 창백한 뺨이 속도의 기색을 살피고 사라지자 꽃병의 눈금이 달로 기울었다 새로운 종(種)으로 태어난 덩굴장미가 시간 속에 앉아 귀를 물들였다 익숙하지만 그대로인 꽃병이 꽃의 자세를 일으켜 세웠다 부끄러운 감정이 뒤에서 서성거렸다 물을 끌어당기는 것은 조금 진실을 닮았다 오랜된 말이 다 익었다 *시집/ 홀연, 선잠/ 천년의시작 환청 - 김정수 목발에 몸 기댄 늦봄 차가운 방이 방을..

한줄 詩 2020.05.27

기도하는 남자 - 강동헌

"사는 게 너무 안 행복하지?" 목사의 아내가 말한다. 맞다. 사는 것이 누구에게나 행복한 건 아니다. 이 영화는 신앙심이 투철한 개척교회 목사 부부 이야기다. 부창부수라고 둘 다 성실하고 착하다. 모범 부부다. 하나님을 믿는 것만큼 서로를 사랑한다. 사랑의 바탕엔 믿음이 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사랑을 말하면서 오늘날 혐오를 조장하는 원산지가 교회다. 이 영화도 개신교를 개척하는 목사가 주인공이다. 목회 활동은 험난하다. 반지하 교회에 딸린 골방으로 숙식을 해결하며 교회 개쳑에 열중한다. 예배 시간이면 열 명도 안 되는 교인이 모이고 그것도 외국인 노동자이거나 곧 다른 곳으로 옮긴다. 요즘의 교회 사모님과는 달리 목사의 아내 또한 착하기 그지 없다. 비록 풍요롭지 않지만 유치원 다니는 두 딸을 사랑..

세줄 映 2020.05.27

시대와 불화한 자의 초상 - 정기복

시대와 불화한 자의 초상 - 정기복 내게 시집 크기의 음영이 짙은 초상 한 점 있다 아침 거른 분주한 출근길에도 서류 가방 챙기듯 들고 보고 다들 퇴근한 늦은 밤에도 이제야 내 시간이려니 느릿느릿 들여다보는 누렇게 퇴색되어 빛바랜 흑백의 표구 한 점 있다 흰 저고리 상투머리 굳게 다문 입 불거진 광대뼈에 타오르는 불온한 눈매 백년 세월도 아랑곳하지 않는 너른 이마에 봉분처럼 솟은 혹 시대와 불화한 자의 매서운 눈초리가 순응과 적응의 내 일상 저편에서 횡설수설 왁자지껄한 술집의 벽 위에서 줄곧 노려보는데.... 까막눈처럼 속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발통문 한 장 있다. *시집/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천년의시작 스라소니 - 정기복 천부적 싸움꾼이 있었다 앉은자리에서 대여섯 걸음 훌쩍 날아오른 박치기에는 ..

한줄 詩 2020.05.26

전생 - 박시하

전생 - 박시하 한 마리 버려진 개로서 교회당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한 적이 있다 빗줄기 사이에서 무언가 희게 펄럭인 걸 기억한다 발은 꺾였고 눈은 멀었는데 어찌 볼 수 있었을까 사실 나는 교회당 그늘에서 숨죽인 타락한 천사였다 이제는 무엇이었는지도 모를 것을 너무도 사랑하여 벌을 받았다 지상의 것 더럽고 추악했을 텐데 어찌 사랑했을까 개의 멀어버린 눈 속에 깃들어 푸르른 죄악 사랑했으니 인간으로 태어남이 마땅했을 것이다 *시집/ 무언가 주고 받은 느낌입니다/ 문학동네 저지대 - 박시하 비 오기 전에는 낮은 바람이 불어왔다 생을 가로지르며 슬픔을 무찌르는 로맨스를 믿은 적도 있다 어떤 감정도 목숨보다 절실하지는 않은데 사랑 던져야 할 것들이 많아서 높고 아름다운 것 빛에 눈이 멀기 전에 습기에 이끌려 내려..

한줄 詩 2020.05.26

지구별을 사랑하는 방법 100 - 김나나

채식주의자나 환경운동가를 유별난 사람으로 취급한 시절이 있었다. 채식주의자도 그만한 사연이 있을 테고 시민운동은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는 마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일이 안 하는 것은 쉽고 하는 것이 어렵다. 채식주의자든 환경운동가든 실천하는 당사자가 더 힘들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책은 환경운동가 김나나가 썼다. 김나나가 연예인 예명처럼 들려서 운동가로는 신뢰감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워낙 가짜뉴스와 사이비 언론이 판치는 시대여서 더욱 그렇다. 책 내용은 새로울 것 없는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굳이 후기를 쓰는 건 저자의 실천하는 행동도 아름답지만 내용이 지구 살리는데 꼭 필요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자기를 살려달라고 한 적이 없다. 지구는 가만히 있는데 인간이 자신의 편리를 위해..

네줄 冊 2020.05.26

눈물 한 끼 - 이서화

눈물 한 끼 - 이서화 봉분 가득한 씀바귀 줄기에서 낯익은 머리카락 냄새가 난다고 바람이 쓴맛을 키우며 아는 체를 한다 맨 마지막에 챙겨 간 늦가을의 기억 잊지 않으려 엄마는 해마다 씀바귀 김치를 마련한다 이파리마다 꽃 진 자리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뽀얀 젖줄을 쟁여두었다 봄바람을 보태 손으로 뽑으면 쉽게 뽑히는 엄마 잔소리 같은 씀바귀 몇몇이 둘러앉아 금방 버무린 씀바귀 김치를 먹는다 뱉지도 삼키지도 못할 쓴맛에 목이 메면서도 몸에 좋다고 말대답하듯 설탕을 뿌리고 식초를 붓는다 참, 맛있다 참, 맛있다 말은 엄마에게서 처음 들었을 것이다 잘 삭은 울음은 형체가 없다 나름 세상의 쓴맛 단맛 다 보았다 생각했는데 왜 엄마라는 말은 눈으로 간을 보는 것인지 왜 짭짤한 눈물 맛을 입안 가득 맛보는 것..

한줄 詩 2020.05.25

내 집에 갇힌 사회 - 김명수

한국 만큼 집 문제가 인생의 전부를 차지하는 나라가 있을까. 막장 드라마 욕하면서 보듯이 집 문제 정책 또한 정부를 욕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집값 오르기를 기대한다. 어쩌다 집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간극은 더욱 벌어졌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때 축구 대표팀 경기가 열리면 온 국민이 TV 앞에서 축구 전문가가 된다. 실수한 선수를 향해 저 새끼 빼라 아우성이고 패스라도 실패하면 나는 저런 새끼 국가대표로 안 뽑는다고 감독이 된다. 주택 정책도 월드컵 때 축구 전문가 못지 않게 전문가가 많다.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불만, 집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불만이고 각자 할 말이 있다. 주택 보급률이 100% 넘겼으니 살기 위해서만 집을 소유한다면 주택 정책은 큰 문제가 없을 듯하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저자가..

네줄 冊 2020.05.25

마침내 바보들이 돌아왔다 - 이원규

마침내 바보들이 돌아왔다 - 이원규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시 한 사람이 떠났다 보내야 했다 한 사내가 떠났다 보내야만 했다 한 바보가 떠났다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른 아침까지 저승새 울더니 한 시대의 풍운아, 한반도의 고독한 승부사 잠시 눈길 피하는 사이 몸을 날렸다 절망과 환멸의 짙은 그늘 아래 쪼그려 앉아 잠시 고개를 숙이는 사이 역주행 한반도의 먹구름 속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사이 한 사나이가 먼저 온몸을 날렸다 살아남은 우리 뒤통수에 벼락을 내리치며 저 홀로 훌쩍 뛰어내리고야 말았으니 부엉이바위는 절명의 성지 이 시대의 처음인 생사일여 순교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떠나고 또 하나의 바보가 돌아오고 있다 비운의 풍운아, 고독한 승부사가 떠나고 마침내 수백 수천만 명..

한줄 詩 2020.05.23

노무현 대통령 추모 전시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펑펑 울었다. 믿기지 않아서 울었고 기가 막혀서 울었고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보수 권력과 그들의 주구인 검찰이 미워 울었다. 내 가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잠깐 운 것 빼고는 누군가의 죽음에 울기는 처음이었다. 긴급 서거 뉴스를 들으면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때 노무현 대통령은 내 가슴에 담은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단 한 사람만을 가슴에 담고 살려 했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나오면서 두 사람이 되었다. 어느 정도 슬픔에 단련이 된 후 봉하 마을을 여러 번 갔다. 처음 갔을 때 울지 않으려 했는데 당신 이름을 새긴 묘석을 보자 눈물이 쏟아졌다. 특별한 날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사람 많지 않은 날을 골라 조용히 다녀온다. 이제는 봉하 마을에 가도 울지 않는..

여덟 通 2020.05.22

낙동강 성형일지 - 김요아킴

낙동강 성형일지 - 김요아킴 -금곡동 아파트 시술은 계속되었다 미끈한 종아리와 일자로 뻗은 각선미를 위해 포크레인 굉음과 함께 덤프트럭들이 진을 쳤다 매일 아파트 베란다로 보여지는 메스질은 갈수록 날카로웠다 옆구리로 밀린 곡선의 살들이 선을 잰 듯 잘려나가고 반듯한 이목구비를 위해 더욱더 뼈를 파내었다 환자의 부작용에 대한 사전공지는 없었다 아름다움에 도취된 기세는 수없는 광고와 자본으로 덧칠을 하며 본래의 유전자를 망각해갔다 중독은 스스로 이겨내지 못할 한계치에서 몸살을 앓았고, 곪아갔다 물음표들이 부표처럼 떠다녔다 ​ *시집/ 공중부양사/ 애지 공중부양사 - 김요아킴 -금곡동 아파트 토요일, 제법 푹신한 침대는 지난 주 노동의 보상으로 달콤하다 못해 살짝 볼륨을 높인 브라운관의 환청 속으로 무언가 검..

한줄 詩 2020.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