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비문증의 날 - 윤의섭

마루안 2020. 5. 17. 20:57

 

 

비문증의 날 - 윤의섭


모기가 아니라 문자가 날아다닌다고 풀이해 보면
이 증상의 덕목은 해독 불가능한 무정형에 있다

동공에 둥지를 튼 새들
홍채의 숲까지 날아가서는 잡히지 않는 암호가 되기도 하는

투명한 물속에 가라앉다 번지는 잉크이거나 산허리에서 흩어져 간 구름 아니
날개를 펼친 나비이거나 흐릿한 얼굴이거나
망막의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달을 바라본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 속에서 나는 여전히 소원을 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다만 주어가 불투명한 비문(非文)이었으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 계속 이루어졌다
나는 눈이라는 행성에 누군가를 두고 온 것이다
유리체의 곡면을 타고 나비는 대륙을 횡단하는 중이다
나비였는가 나비는 왜 잠들지 않는가
동공에 떠다니는 점문은 왜 꿈속에서만 읽을 수 있는가

눈물인지 핏물인지 구분할 수 없는 점액의 문자가 쏟아져 내린다
그러니 모든 빗줄기는 단 한 획으로 쓰인 서사시
결단과 고통과 비극이 담겨 있지만
읽으려 들 때마다 흩어져 버리는 음유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민음사

 

 

 

 

 

 

감염 - 윤의섭


이건 몸에 쓰이는 후기 혹은 가장 오래 이어진 필사여서
아프기 전에 이미 아픔의 절정을 알고 마는 참어(讖語)
같은 증세로 저녁의 구름은 노을을 옮겨 적는다
꽃 내음은 바람을 적시고 바람은 멀리 한 계절을 끌고 간다
그러니까 나는 네게 복제된 증상이다
비접촉으로도 너의 고통과 결합하는 방식
물들기 쉬운 내력을 앓고 있었으므로 너는 다시 내가 불러낸 처음
어느 살점 속에 말없이 뿌리내리다 떠나가는 유목은 흔적을 남기지 않지
치명적이더라도 내게만 머물기 바라는 난치의 기억
내게서 자라나다 내 안에서 죽어야 하는 너라는 병
전이의 경로를 따라가 보면 달처럼 맴돌았다는 진단이 나올 것이다
한때 월식이 있었고 해독하기 힘든 천문이 새겨졌을 것이다
온몸으로 퍼지는 불온한 증여를 들여다본다
여기에 어떤 병명을 갖다 붙여도 가령
빗방울에 스민 구름 냄새라든가
단풍나무가 머금은 햇볕의 온기라든가
어쩌면 네게서 너무 멀어져 알아내기 힘들지라도
나는 지금 징후와 후유증 사이의 중간계를 통과하는 중이다
나는 아프기도 전에 감동했다는 것이며
물들었으므로 닮아 가야만 하는 의례를 따라
그리하여 면역이라는 영역에 들어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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