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왼손이 집을 나갔다 - 한관식

마루안 2020. 7. 2. 19:15

 

 

왼손이 집을 나갔다 - 한관식


호된 질책도 매질도 없었지요
그날은 여느 날처럼 평온했고 반찬투정 없이
밥 한 공기를 가뿐하게 비운 모습에서
별다른 낌새는 느끼지 않았어요
가만, 그러고 보니 약간은 의도하지 않는 곳에서
덤벙대는 모습을 보긴 했지요
가령 악수할 때 나서는 소소한 질투에서부터
팔씨름에서 오른손을 밀치고 앞장서거나
사인을 해야 할 각인된 자리에서 
대뜸 볼펜을 집어든 따위
눈짓으로 제지를 물론 했었지요
그런 것으로 상처를 받았다면 
나도 수십 번 상처를 받았겠네요
어디에든 대표선수가 있기 마련인데
물주전자선수가 넘볼 자리는 아니잖아요
그래도 막상 소식도 끊기고
내 눈앞에서 얼쩡거리지 않으니
말이 나와서 말인데 보고 싶긴 하네요
해서 신문광고 난에 한 줄 올렸죠
'오른손 장갑 줄여 놓았으니 즉시 돌아오렴'


*시집/ 밖은 솔깃한 오후더라/ 보민출판사

 

 

 

 

 

 

왼손에 대한 보고서(둘) - 한관식


오십 년 전 
막연히 새총을 갖고 싶다는 덜 여문 내가 
마침 눈에 띈 모나미 볼펜 껍데기로 
계산된 생각 따로, 움직이는 몸 따로
그렇게 도루코 면도날로 덤벼들었다
애초에 계획이 없었던 가늠쇠의 필요성을 
총열 작업 중에 마음속에서 다투기도 했지만 
멀쩡한 알맹이를 버린 볼펜 껍데기와 호흡은
들키지 않고 신속하게 끝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혼자라는 은밀한 곳에서
완성할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을 거치는 동안
무심해지는 이 커다란 시간
부딪혀야만 하는 시간의 리듬을
굼뜨지 않는 선에서 맞추려고 노력했다 순간,
날카롭고 선명한 수다쟁이처럼 스쳐 지나간 
울림은 왼손을 통과하자마자 시침 땐 도루코만 보였다 
아홉 살의 선혈은 바닥을 적시고 
선과 후를 따지기 전에 오른손이 재빨리 감싸주었다 
그때 맞잡은 서로를 인식하며
사계절이 피고 지는 것을 적절하게 안배하며
그 후, 서로에게 질긴 인연인 줄 알고
무심히 챙겨주던 한 덩이 세세함이 기계 밑에 깔린
왼손을 놓아주고 더는 만날 수 없다는 소리
내 안에서 잊혀져 가면서 느껴지는 왼손의 체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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