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 - 도널드 홀

마루안 2020. 8. 17. 21:49

 

 

 

이 책은 미국의 계관 시인 도널드 홀(Donald Hall)이 여든 이후에 쓴 에세이다. 그래서 원래 제목도 <Essays after eighty>다. 번역서인데도 제목을 잘 지어서 더 빛이 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그럴 것이다. 오래는 살고 싶은데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이라고,,

 

제대로 짚었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에 늙지 않고 오래 사는 경우는 없다. 도널드 홀은 1928년에 태어나 2018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훈장까지 받은 계관 시인이라는데 그의 시를 읽어보진 못했다.

 

희한하게도 70년 이상 글을 썼고 50권이 넘는 책을 출간한 유명 작가인데도 국내에 번역된 작품은 없다. 내 독서 편력이 협소한 탓인지는 몰라도 이 책 외에 다른 작품을 찾을 수 없다. 경제, 정치, 문화 모든 면에 미국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온 한국이다.

 

미국에서 공부한 유학생이 많기도 하지만 미국 유학이 대단한 훈장인양 대접 받는 사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도널드 홀의 그 많은 작품이 소개되지 않은 것이 의아하다. 의도적인지 아니면 그의 글이 국내 독자에게 읽히지 않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 사람 글은 단문이다. <어머니는 코네티컷주에 있는 집에서 아흔을 맞았다. 그녀는 같은 집에서 60년 가까이 살았다. 마지막 10년은 창밖을 내다보며 소일했다. 아버지는 쉰두 살에 돌아가셨다>. 자신의 지난 날을 돌아 보는 회고담인데도 아주 생생하고 재밌게 읽힌다.

 

정열적으로 활동하고 글을 썼던 그도 여든 이후의 삶에 떨어진 기력은 어쩔 수 없다. <이제는 혼자 힘으로 요리를 해 먹지 못하고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홀아비용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를 때운다. 손가락의 움직임도 둔하고 옷의 단추를 끼우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린다>.

 

도널드 홀의 글은 변하지 않는 오래된 공간에서 탄생했다. <세대에 세대를 거듭하며 우리 집안 노인들은 창가에 앉아 세월이 가는 것을 보아왔다. 이 집엔 유서 깊은 침대가 많다. 자신이 태어난 바로 그 침대에서 80년 후 숨을 거둔 분들이 적지 않다>.

 

새것 좋아하는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세월은 10년씩 흘러갔다. 서른 살은 겁나는 나이였고 마흔 살이 되던 날은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눈치채지도 못한 채 지나갔다. 50대가 최고였는데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 60대가 되자 50대의 행복이 연장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암에 걸렸고 아내가 죽었다. 그 후의 여러 해를 돌아보면 마치 다른 우주로 여행을 온 것 같다>.

 

평생 써온 시에 대한 솔직한 감정도 그대로 표출된다. <오늘날 찬사를 받는 시인 열 명 중 아홉 명의 시는 30년 후면 읽히지 않을 것이다. 시인들은 자기네가 오래갈지 금방 사라질지 알지 못한다. 시인들 스스로 자기들의 시가 영원불멸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우울증에 걸렸거나 정신병자일 것이다>.

 

그는 오래 살고 싶었고 여든 이후에도 한 살씩 보태면서 장수를 누렸다. <10여년 전에 넘어져서 다치는 바람에 응급실에 갔었다. 당직 의사에게 혈압 수치를 묻자 그는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근데 얼마나 더 살고 싶으신 건데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아무 숫자나 갖다 댔다. "여든셋까지요" 여든넷이 되던 생일날 나는 조용히 안도했다>.

 

그렇다고 오래 사는 것이 꼭 복이기만 할까. 누구는 칠십 넘기면서 치매로 정신줄 놓고 가족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저자는 여든 이후까지 글을 쓸 수 있을 정도의 기력이 있지만 일상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 

 

<나는 똑같은 하루를 매일매일 산다. 아침이 오면 커피를 만들고 치아를 풀로 붙인다. 알약 네 개를 삼키고 식이섬유를 마신 다음 수염을 훔친다. 삐꺼덕거리는 무릎 위로 지지대를 고정시키고 부종 위로 아플 정도로 꽉 끼는 스타킹을 신는다. 그다음에 신문을 읽고 커피를 마신다>.

 

<취침 시간도 기상 시간만큼 권태롭다. 아침에 마실 커피를 커피 머신에 집어넣고, 틀니를 빼서 담가놓고, 저녁때 먹는 알약들을 삼키고, 지지대를 풀고, 꽉 끼는 스타킹을 벗는다>. 저자는 이런 일상 속에서 아름다운 글을 썼고 낮잠을 자고 공상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정말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