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있잖아요, 분홍 - 정진혁

마루안 2020. 9. 2. 19:29

 

 

있잖아요, 분홍 - 정진혁


분홍이라는 말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분홍으로 산다는 건 달콤하게 익어 가는 것
내 눈과 내 낱말들이 누군가의 한 잎 속에서 산다는 것

당신의 한 잎은 온통 숨결이어서
마음을 실어 나르는 수레여서
분홍 잎맥을 따라 스며든 시간들 사이여서

날마다 분홍 안에서 익숙해지는 몸짓
분홍을 입어요, 분홍을 먹어요, 분홍을 춤춰요
분홍은 나를 얼마나 멀리 밀고 가는지

있잖아요, 그거 알아요?
청평이라든지 덕적도 여수 부산 통영 무의도 같은 지명을
여기선 다들 분홍이라 불러요
한여름 배롱나무 산딸기 복숭아 떨어지는 꽃잎도 나는 분홍이라 불러요

분홍에서만 나를 느낄 수 있으니
뒤집혀도 분홍
분홍과 분홍 사이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둥긂이 되었지요

있잖아요
분홍 한 장을 넘기며 가장 낮은 곳 가장 높은 곳에서
울어 본 적 있나요?
한 잎의 분홍 앞에서 웃어 본 적 있나요

오늘은 분홍이 지는 곳까지 걸어가 봤어요
거기까지 가 보니 당신이 진짜 분홍이었어요
오뉴월 복중 같은 사내 하나가 그 속으로 들어가서는
영 나오지 않았어요


*시집/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출판

 

 

 

 

 

 

미조항 - 정진혁


돌아오는 모든 날들은 방풍림 후박나무 사이를 지난다

모르는 생각을 베고 누우면
미조항 골목 어디엔가 버리고 떠나온 옛집이 있을 것 같다
오래된 마당 오래된 우물 오래된 부모 오래된 대추나무

봄에는 미조항에 가서
입 잃고 눈 잃고 길 잃기를
아름다운 생 하나 후박나무 아래 서 있기를

어느 생으로부터 눈물이 흐른다

온 생을 밀고 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야
미조항은 있는 것일까

미조(彌助)가 피었다
전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