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녁, 외딴집 - 김성장

마루안 2020. 9. 7. 21:48

 

 

저녁, 외딴집 - 김성장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여든 노인의 때 전 머릿수건
들판의 헤게모니가 바뀌는 시간
노인이 뒷모습을 보이자 벼가 익는다
강 쪽으로 줄지어 선 집들, 빈 것들
방의 허공은 그나마 남겨두고 떠난 사람들, 빈것들
마을의 북쪽
떠나면서 상념이 더 길어졌다
골짜기의 음산이 노을에 끌려온다
바람은 문을 닫으며 초저녁 뒤로 사라진다
새들이 들판의 고요를 접는다
떠나면서 거미줄 잠금장치 하길 다행이지
노인이 방문을 열자 덜컥 낡은 구루마 바퀴 빠진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처마 아무 참견하지 않는다
이제 간섭은 이 근처에서 사라진 현상
헛간에 걸린 낫이 회고록의 새로운 필진이 되었다
표지엔 붉은 녹이 가득하다
들킬 것도 없는 내면의 풍파
늙는다는 건 말라간다는 것
익는다는 건 푸석해진다는 것
오래된 폐경 속으로 어둠과 고요가 몸을 섞는다


*시집/ 눈물은 한때 우리가 바다에 살았다는 흔적/ 걷는사람

 

 

 

 

 

엘리제를 위하여 - 김성장


큰길이 들어서기 전까지
이곳은 여러 모퉁이들이 살던 곳
한쪽 모퉁이가 저쪽 권력을 향하여 햇살을 던지면
햇살을 피해 손수레가
허리 꺾인 노파를 싣고 가던 곳

모퉁이가 구석을 데리고 살며
그런대로 잘 보살폈던 곳이기도 했다
모퉁이는 구석의 무릎과 같은 것 언제든지
굴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고관절이 아파 기우뚱하던 가로등이
전향을 하지 않기로 했지만 끝내
포클레인에 쓰러져 폐기된 자리가 저쪽

청소차가 지나가며 뿌려주는 엘리제를 위하여
소리에 모퉁이와 구석 사이가 물속처럼 투명해지던 곳
물론 모퉁이와 가장 가까운 자는
구석에서 쓸쓸을 연주하던 귀뚜라미스트였다

이제 다 지난 이야기가 되었지만
모퉁이를 돌면서 나의 어깨가 깎인 덕분에
나는 이후 어떤 좁은 골목도 용케 지날 수 있었다
기꺼이 나의 구석이 되어 주겠다는
별 모양의 벌레를 만나기도 했다 그것조차
이제 모두 쇠락의 길로 들어섰지만

모퉁이가 찍힌 사진을 들고 나는
새로운 인화지를 구하러 가야겠다
일가의 모퉁이 끝에 모여
이 도시에 더 이상 구석은 없다는 온건파들에게
다른 해석을 요구해야 할 것 같다
차세대 벌레들이 구석에 몰려드는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 김성장 시인은 1988년 <분단시대>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서로 다른 두 자리>, <눈물은 한때 우리가 바다에 살았다는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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