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흉터의 문장 - 류시화

마루안 2022. 7. 2. 21:57

 

 

흉터의 문장 - 류시화


흉터는 보여 준다
네가 상처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걸
네가 상처를 이겨 냈음을

흉터는 말해 준다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럼에도 네가 살아남았음을

흉터는 물에 지워지지 않는다
네가 한때 상처와 싸웠음을 기억하라고
그러므로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러므로 몸의 온전한 부분을
잘 보호하라고

흉터는 어쩌면
네가 무엇을 통과했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화상 입힌 불의 흔적
네가 네 몸에 새긴 이야기
완벽한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완벽한 고통

흉터는 작은 닿음에도 전율하고
숨이 멎는다
상처받은 일을 잊지 말라고
영혼을 더 이상 아픔에 내어 주지 말라고

너의 흉터를 내게 보여 달라
나는 내 흉터를 보여 줄 테니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우니까

 

 

*시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수오서재

 

 

 

 

 

 

파란색 가난 - 류시화

 
가난하다고 해도
너는 아주 가난하지는 않다
가령 아무 가진 것 없이
파란색 하나만 소유하고 있다 해도
그 파란색에는
천 개의 파랑이 들어 있다
다른 색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바다의 파랑이 있고
감정에 따라 변하는 하늘의 파랑이 있다
전혀 파랗게 보이지 않지만
파란색이 없으면
완전히 다른 색으로 변하는 색도 있다
밤을 지샌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투명에 가까운 파란 새벽도
폭풍을 이겨 낸 파랑도 너의 것이고
어린 시절 가졌던 짙은 파랑과
사춘기의 창백한 파란 혈관도
너의 것이다
가난하다고 해도
너는 아주 가난하지는 않다
거기 언제나 가슴 안쪽에
알려진 어떤 파란색보다 파란
희망의 조흔색이 있으니까

 

 

*조흔색 - 광물을 초벌 구운 흰색 자기에 문질렀을 때 생기는 고유한 빛깔의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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