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으로 가는 인생 - 박판식
골목 벽에는 낙서가 가득하였다, 마담 k는 하루하루 희망 없는 날을 보냈고
인생이 잘 안 풀리는 이유를 몰랐고 물론 나도 몰랐다
하늘은 푸르다,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알약들이 목을 넘어가고
나는 꿈속에서 시원하게 군복을 벗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너는 죽을 거야
니 무서운 소원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너는 사람대접 못 받을 걸
네 가닥으로 찢어진 마음이 마취에서 풀려나 통증이 밀려왔다
니 아버지는 늙은 탈영병, 어둡고 께름칙한 깨달음을 어린 나에게 주었다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인가 이 쉬운 질문 앞에
내가 날마다 엎드려 얼마나 절망하는지 너는 모르고
그렇다고 과장할 필요는 없고
*시집/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 문학동네
나는 말한다 - 박판식
인생은 발걸음이 빠르다, 화요일에는 엉터리 같은
결심을 하고 금요일에는 2킬로그램쯤 살을 찌워서는
물방울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그 결심에 구멍을 내고 있다
마음은 사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구멍이 난다
이이는 사, 삼삼은 구, 사사 십육
아무런 문제 없는 인생은 우리를 속이는 거라고 이 친구야
삼 개월 감봉 당한 친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목 아래로 흘러내린 양말을 당겨 올린다
곧 눈이 내릴 것만 같다
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죽는다
굴다리 아래로 걸어 들어가는 외삼촌은 갑자기 파산했고
내용 없는 엽서가 사무실로 배달되었다
무엇인가가 이 세상에서
당신과 나를 놓지 않고 있다
그 못은 대체 어떻게 생겼는가
착오라도 있었다는 듯이 눈은 내리자마자 녹아버린다
바람이 눈을 밀치고 행인과 입간판을 차례로 밀친다
떠밀린 채로 문이 열리고 다시 문은 열리고
# 박판식 시인은 1973년 경남 함양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밤의 피치카토>,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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