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 - 문신

마루안 2022. 6. 29. 21:28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 - 문신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이다
공단 지대를 경유해 온 시내버스 천장에서 눈시울빛 전등이 켜지는 저녁이다
손바닥마다 어스름으로 물든 사람들의 고개가 비스듬해지는 저녁이다

다시,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이다

저녁에 듣는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착하게 살기에는 너무 피로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문득 하나씩의 빈 정류장이 되어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내버스 뒤쪽으로 꾸역꾸역 밀려드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을 저녁이라고 부른들 죄가 될 리 없는 저녁이다

누가 아파도 단단히 아플 것만 같은 저녁을 보라
저녁에 아픈 사람이 되기로 작정하기 좋은 저녁이다

시내버스 어딘가에서
훅,
울음이 터진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저녁이다

이 버스가 막다른 곳에서 돌아 나오지 못해도 좋을 저녁이다

 

 

*시집/ 죄를 짓고 싶은 저녁/ 걷는사람

 

 

 

 

 

 

신도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이다 - 문신


저녁이 오는 동안 혀끝이 쓰라리다
후박나무에 비가 내렸다
쓰라리다, 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혀끝은 쓰라리고

하루,
어쩌면 온종일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쓰라리지 않기 위해
울음보다 가볍다는 소리까지 몽땅 토해냈는데
후박나무가 젖는다

혀끝에 박혀 있는 저녁,

어깨를 굽힌 사람이나 턱을 치켜든 사람이나
저녁에 닿는 일은 쓰라림에 닿는 일

후박나무는 후박나무답게 저녁을 맞이하고
저녁에는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므로
견습생 같은 삶이라도 어설퍼서는 안 된다

잠시 비를 긋는 심정으로 후박나무에 기대면
저녁으로 모여든 빗물이
어깨에 스미고

신의 허락 없이는 죄를 지을 수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땅에 묻고 돌아온 사람만큼은
신도 외면하고 싶은 저녁

후박나무에서 떨어져 내린 빗물이 신의 혀끝에 박힌다
쓰라리다

인간이 눈 감는 시간을 기다려 신도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이다

 

 

 

# 문신 시인은 전남 여수 출생으로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물가죽 북>, < 곁을 주는 일>,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이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뒤뜰 - 편무석  (0) 2022.06.30
다시 세상을 품다 - 홍신선  (0) 2022.06.29
장마철 - 최백규  (0) 2022.06.28
인연도 긴 세월 앞에 부질없어 - 부정일  (0) 2022.06.28
진정한 멋 - 박노해  (0) 2022.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