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서촌(西村)보다 더 서쪽 - 황동규

마루안 2020. 11. 15. 19:36

 

 

서촌(西村)보다 더 서쪽 - 황동규


가을이 너무 깊어
갈수록 철 지난 로봇처럼 되는 몸
길이나 잃지 말아야겠다.

길이라니?
버스와 전철 번갈아 타고 걸어
서촌보다 더 서쪽 동네 가게에 들러
맥주 한잔 시원하게 들이키고
인왕산 서편을 달관한 로봇처럼 천천히 걸으리.
빈 나무에 단풍 몇 잎 떨어지지 않고 모여
가르랑대고 있다.
'이제 말 같은 건 필요 없다. 가르랑!'
로봇도 소리 물결 일으킨다'
'평생 찾아다닌 거기가 결국 여기?'
그래, 내고 싶은 소리 다들 내보게나.

숨 고르려 걸음 늦추자 마침
해 지는 곳을 향해
명상하듯 서 있는 사람 하나 있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로봇이군.
방해되지 않을 만큼 거리 두고 나란히 선다.

흰 구름장들 한참 떼 지어 흘러가고
붉은 해가 서편 하늘을 뜬금없이 물들이다
무엇엔가 빨리듯 하늘 뒤로 넘어간다.
옆 로봇이 천천히 내 쪽으로 몸을 돌리며
혼잣말처럼, '하늘에도 앞뒤가 있군요.'
내가 머뭇대자 그는 다시 혼잣말처럼,
'앞보단 뒤가 더 큽니다.'
말을 아끼는 로봇이군!

혼자 언덕을 내려오며
나도 모르게 그의 말을 풀이했다.
'앞서간 삶보다 뒤에 남은 삶이 더 버겁습니다.'
내리받인데
숨이 찼다.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



 



오늘 하루만이라도 - 황동규


은행잎들이 날고 있다.
현관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또 하나의 가을이 가고 있군.

수리 중인 엘리베이터 옆 층계에 발을 올려놓기 전
미리 진해지려는 호흡을 진정시킨다.
해 거르지 않고 한 번쯤 엘리베이터 수리하는 곳.
몇 번 세고도 또 잊어버리는
한 층 계단 수보다 두 배쯤 되는 수의 가을을
이 건물에서 보냈다.
그 가을 수의 세 배쯤 되는 가을을
매해 조금씩 더 무거운 중력 추 달며 살고 있구나.

2층으로 오르는 층계참 창으로
샛노란 은행잎 하나 날아 들어온다.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은행잎! 할 때 누가 검푸른 잎을 떠올리겠는가?
내가 아는 나무들 가운데 떡갈나무 빼고
나뭇잎은 대개 떨어지기 직전 결사적으로 아름답다.

내 위층에 사는 남자가 인사를 하며 층계를 오른다.
나보다 발 더 무겁게 끌면서도
만날 때마다 얼굴에 미소 잃지 않는 그,
한 발짝 한 발짝씩 층계를 오른다.
그래, 그나 나나 다 떨어지기 직전의 나뭇잎들!

그의 발걸음이 몇 층 위로 오르길 기다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집 8층까지 오르는 층계 일곱을
라벨의 <볼레로>가 악기 바꿔가며 반복을 춤추게 하듯
한 층은 활기차게 한 층은 살금살금, 한 층은 숨죽이고 한 층은 흥얼흥얼
발걸음 바꿔가며 올라가보자.

 

 

 

 

# 황동규 시인은 1938년에 평안남도 숙천에서 황순원 소설가의 맏아들로 태어나 1946년에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에서 성장했다. 서울대 영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미국 뉴욕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즐거운 편지>를 포함한 시 3편이 서정주 시인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악어를 조심하라고?>, <풍장>. <외계인>,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겨울밤 0시 5분>, <꽃의 고요>, <사는 기쁨>, <연옥의 봄>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김종삼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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