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늦가을 달맞이꽃 - 한승원

마루안 2020. 11. 8. 19:04

 

 

늦가을 달맞이꽃 - 한승원

 


찬바람
줄달음질하는 늦가을 농수로에 투영된
서역으로 떠나가는 이른 아침의 창백한 달그림자를
심호흡으로 빨아들인
흰나비 같은 내 넋을
훔쳐 가곤 하는 달의 상아(孀娥)여신을
애인이라고 여기는
망상 한 자락
간밤 그대 잠깐 내려와
내가 밟아갈 산책길 가장자리에
내 차가운 가슴을 덥히기 위해
호오, 호오 불어 놓았구나
여신의 입 비린내 나는
황금빛 뜨거운 숨결을

 


*시집/ 꽃에 씌어 산다/ 문학들

 

 

 

 

 

 

내 허벅다리에 각인된 만월 - 한승원

 


심하게 흔들릴 때면
내 허벅다리에 각인된 만월이 생각나고
창공에 드높이 뜬 만월을 보면
그것이 알 수 없는 흔들림의 세계로 미끄러지는 나를
붙잡아 주곤 한다
처음 흔들리는 삶을 경험한 것은
어머니의 등에 업힌 채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덕도의 집에서 대덕읍내의 병원까지의
시오리 길 위에서였다
창공의 달을 머리에 인 채 잠든 아기를 업고
산모퉁이를 돌고 바다를 건너 돌아왔을
스물다섯 살의 어머니,
스물한 살의 내가 절망과 방황으로 흔들렸을 때
마흔다섯 살의 어머니는
내 허벅다리 한복판에 새겨진 만월을 말해 주었다
너의 허벅다리에 알 수 없는 습진이 생겼는데 그것이
허벅다리를 뚝 끊어 놓을 듯 깊이 파먹어 들어갔는데
그 자리에 둥그런 만월이 생겼다고
아, 만월, 내 오른쪽 허벅다리에 새겨진 만월은
평생토록 내 영혼 한복판에 떠서 나의 길을 밝히고 있다

 

 

 

 

# 한승원 선생은 1939년 전남 장흥 출생으로 1968년 <대한일보>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열애 일기>, <사랑은 늘 혼자 깨어 있게 하고>, <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 <달 긷는 집>,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이별 연습하는 시간>, <꽃에 씌어 산다>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물에도 전성기가 있다 - 이운진  (0) 2020.11.08
아득한 독법 - 조하은  (0) 2020.11.08
나의 아름다운 벽 속에서 - 이소연  (0) 2020.11.07
나는 코끼리다 - 유기택  (0) 2020.11.07
눈독 - 우남정  (0) 2020.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