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는 코끼리다 - 유기택

마루안 2020. 11. 7. 22:12

 

 

나는 코끼리다 - 유기택


사는 건 순전히 죗값이다

아버지며 어머니며 형들이며
남은 심지, 까맣게 타들어가다
맥없이 툭툭 부러지던 며칠을

나는
속마음을 먼저 놓았던 죗값이다

세상 어딘가에
코끼리 무덤이 있다고 들었다

너무 환해
차라리 놓으라 한 반지빠른 속말을
희미하게 웃던 그리움에
편히 사위어 가라 차마 못한 말을
죄 탕감하며 본
이젠 누가
내게 거짓말을 하게 될지도 아는

코끼리는 그때가 오면
스스로 무리를 떠난다고 했다

떠난 그 계절마다
돌아온 무리가 그를 맡고 간다고

자기 생의 기도처럼
머물다 떠난다고 했다

살아남은 것이 미안하지 않도록
어디 코끼리 무덤이 있다고 했다


*시집/ 호주머니 속 명랑/ 북인

 

 

 

 

 

 

0이 1로 비워지는 동안 - 유기택


시월이 마지막 가던 날 저녁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바람이 저물어 십일월이 되었습니다

십일월은 바람이 흔들어놓고 간 막대 바람종
바람이 종일 그 종을 흔들어 챙그렁거리다
마지막 주막을 살고 간 주모를 불러냈을 겁니다

11월은
부엌간 바람벽에다 주모가 부지깽이로 그어놓은
외상장부 속 사내들의 이마 위 바코드
외상을 살다간 사내들 걸음의 삐뚤빼뚤한 이력

그런 델 또 살고 있는 건 아닌지
10에서 11로, 0이 1로 채워지는 거꾸로
비어가는 사내 같은 델 두드려보다 들여다보다

문득
십일월을, 어떻게 다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시인의 말

호주머니 속에 든 추자(楸子) 두 알처럼,
손때 올라 반질거리는 생각들을 모았다.

달각거리는 소리를 따라가면 누가 있다.

다정하게, 안녕?

사느라, 모두 조금씩 쓸쓸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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