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정미소의 화평 한 그릇 - 고재종

마루안 2020. 11. 16. 21:38

 

 

정미소의 화평 한 그릇 - 고재종

 

 

양철지붕 벌겋게 녹슨 늦가을의 정미소엔
아직도 얼기미에서 유리알 쌀이 무척 쏟아질까
아무려나 곤고의 일에서 좀 놓여나면
노란 왕겨가 마굿간으로 수북수북 쌓이던 정미소
그 향기 속에 좀 들러 불까, 몰래 뒷짐 지고 들러
신신한 쌀 냄새에 흠흠거리며
쌀 한입 탁 털어 넣고 씹다 보면
고소한 쌀즙이 이내 입안에 가득하겠지
그러면 참새 떼도 아니 들르고는 못 배겨서
이따금 주인이 훠이, 하고 내질러도
아예 천국의 맛을 쪼는 데 열심일 거야
마을과 저만치 떨어져 있어도
통통통통 울려 대는 발동기 소리가
마을과 들길을 단박에 장악해 버리던 늦가을 정미소,
아무려나 왕겨며 쌀가마가 산처림 실리면
히잉, 말조차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말 달구지는 마을 집집으로 내달릴 걸
그러면 겨우내 텅 비어 양철 두른 벽 펄럭거리는
정미소까지는 저만치 두어 두고


수고의 한 해가 융융한 지족을 낳던 정미소
늦가을 햇살 아래 잠깐, 화평 한 잠을 누리겠네

 

 

*시집/ 고요를 시청하다/ 문학들

 

 

 

 

 

 

입동맞이 - 고재종

 

 

어머니의 오래된 유산 중 하나인
기름 먹여 반질한 가마솥을 소환했다
정글어 가는 한 해의 노년을 뒷짐하고
동구에서 서성이는 십일월의 하루,
마당귀에다 내걸고
새벽마다 일삼아 팬 장작으로 불을 메웠다
젊은이라곤 씨알머리도 없어
칠팝십에 장년이라고 웃는 노장들이
맛이 지금쯤 딱 맞춤이라는
구십 근짜리 돼지의 저승을 당겼다
된장과 마늘을 풀고 황칠나무를 넣고
동구 밖의 색 바랜 기다림만큼을 삶아 대니
솟구치는 김은 새털구름이 되고
못 따낸 집집의 감들은 더욱더 앙분했다
과방하는 씩씩한 고모가
펄펄 김 나는 고기를 숭덩숭덩 썰어 냈다
담넘엇집에서 이바지해 온 김장김치에
고기를 쌈해 아귀가 미어지노라니
눈알만 한 잔도 좋이 털어 넣는 씩씩한 노인들,
십일월의 시린 것도 후끈해진다
벌써 몇 낱낱 성기는 눈송이조차도
기다림으로 반기는 순명의 일이다면
아직은 저승보다 따뜻한 입동 아닌가, 이내
장구 소리 꽹과리 소리 십 리 밖까지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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