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단추가 느슨해진다 - 이병률

마루안 2021. 1. 17. 22:00

 

 

단추가 느슨해진다 - 이병률


인연이 느슨해져서
꽉 물고 안 놓을 것만 같던 인연이 헐거워져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서
밤길을 걷고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기보다는
집을 나서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싶어

밤길을 걷다 돌고 돌아서도 걷다가
머리를 밀어볼까도 생각하였다

우리는 단추 같은 존재들이기도 할 것이어서

같은 단추들과 나란히 배열을 이루다가도
떨어져 온데간데없이 잃어버리고 마는
단추 같기도 할 것이어서

도무지 헐렁해져서 어느 날 다시 입을 수 없는
벗어놓은 바지 같을 것이다

우리의 어떤 일 같은 것들은 단추가 되어
매달리기도 하고

우리의 아무 일 같은 것이 단추가 되어
느슨히 떨어지기도 하는

그 극명한 절정의
전과 후가 만들어낸 길을 걷다가

그만 실을 밟고 실에 감겨 넘어지면서
밤길을 걸었다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빈집 식물에 물 주는 사람 - 이병률


손님 예약이 다 차지 않는 날에는
빈방을 돌며 잠을 잤다
내 관리 목록에는 다섯 채의 집과 여덟 개의 오피스텔이 있다
깨끗한 침대를 어지럽히기 싫은 날은 침대 아래에서 잤고
청소가 다음날로 미뤄진 집에서는
침대 위에 그대로 누워 잤다

이래도 되는 삶은 있다
사람들이 남기거나 버려두고 간 음식들을 먹었고
잊고 간 옷들과 입고 버리고 간 수치들을 빨아 입었다

오 일에 한 번 집들을 돌며 나무 화분에 물을 주는 날에는
열매가 열리기를 바랐다
침대에 누워 다른 사람이 벗어둔 냄새들 때문에
잠들 수 없는 날도 있었다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삶에 갇혀 지냈다

그날도 누군가 주방에 남겨둔 달걀을 삶았다
비밀이 괜찮은 것인지 보려고
속으로부터 익어가는 것들을 갈라봤다

빈집 식물에 물 주러 갔다가
그곳에서 지내는 횟수를 늘릴 때마다 꿈을 꾸었다

빈집인 줄 알고 문을 벌컥 열 때마다
사람이 들어 있는 꿈이었다

 

 

 

# 이병률 시인은 1967년 충북 제천 출생으로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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