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을의 문턱 - 김영희

마루안 2021. 1. 21. 21:29

 

 

가을의 문턱 - 김영희


절기는 더위를 땅 밑으로 끌어내렸다

중력의 자장 속으로 들어가는
치솟았던 감정들과
어느덧 지쳐버린 유한한 모양의 요소들
한때는 무한함을 믿기도 했었던
가령, 사랑이나 희망 따위

여름을 벗어놓은 시간은
고적한 것들을
가을의 문턱으로 부른다

거리로 몰려나온 사람들이 많아
오히려 쓸쓸해지는 처서를 건너는 저녁
변신과 함께 사라져갈 풍경과,

낯선 노래를 주머니 속에 구겨 넣으며
미리 와 있었던 추억처럼 나는 나를 기다린다


*시집/ 여름 나기를 이야기하는 동안/ 달아실

 

 

 




뒤란 - 김영희


그해 엄마를 태운 꽃가마가 마지막으로 뒤란을 한 바퀴 돌 때
얼굴들은 젖은 뒤축 한 구석을 수런수런 말리고 있었는데,

뇌수를 말리는 맨드라미는 꽃상여에서 떨어진 한 방울 울음이어서 색이 진했다

단 한 번도 드러내보지 못한 뒤란 같은
엄마의 시간 속을 찾아와보니
다른 궁리라도 있기나 한 것처럼
떨어진 잎들은 뒤란에 모여 옹송그린다

가을을 말리는 맨드라미는 여태도 붉고
소금항아리를 덮은 짚방석이 여록으로 꽃을 피워놓았다

만지면 부서질 것 같아도 균형을 잃지 않던 엄마의 시간들이 뒤란에 다시 피어났다


 


# 김영희 시인은 강원도 정선 출생으로 2014년 계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양파의 완성>, <당신이 내게로 올 때처럼>, <나무도마를 만들다>, <여름 나기를 이야기하는 동안>이 있다. 2019년 원주문학상, 2020년 강원문학 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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