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멀어서 아름다운 것들 - 신표균

마루안 2021. 1. 22. 21:42

 

 

멀어서 아름다운 것들 - 신표균

 


멀리 다녀온 따뜻한 빛이나
높이 모셔두어야 경외로운 신은
두말할 것 없이
섬을 삼키는 파도의 악다구니가
건반 위의 은파로 변환되는 것은

멀어서 아름답다

멀리서 그림엽서 보내오는 노을은
태양과 구름의 육탄전일 테지만
기러기 떼 노을빛 날갯짓 창천 물들이면
먼 곳의 그가 더욱 그립고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 꿈에 나타난다

닐 암스트롱 발자국 찍던 날
계수나무 아래 방아 찧던 토끼
혼비백산 사막 모래 구덩이로 사라진 후
총성 멎을 날 없고
근경은 전쟁이 되고 원경은 풍경이 되는
가보지 못해 발걸음 닿지 않은 곳

멀어서 아름답다

가까울수록 너무 먼 당신 품이 더욱 따뜻한 것은


*시집/ 일곱 번씩 일곱 번의 오늘/ 천년의시작

 

 

 

 

 

집시 또는 시집을 위한 집 한 채 - 신표균


꿈 찾는 사람들 넘쳐 나서
여인숙을 짓는다

점쟁이 집시 여인, 마도위나 땜장이 남자 집시
누구라도 무시로 들락이며
문지방에 윤이 나는 그런 여인숙이면 더욱 좋겠다

자음으로 기초를 놓고
모음으로 기둥 세워
용과 거북이 불러 대들보를 얹는다

오랜 풍상 살아남은 상형문자 옻칠하여
틈새마다 대패질로 요철 지붕 촘촘하게
유리걸식하는 집시들 별 꿈 꿀 수 있지 않을까

여인숙에는 창을 내지 말 일이다
뚫린 창문으로 사연 궁금한 행인들 까치발 세울 것이고
세상 궁금한 덜 여문 집시들
맨발로 뛰쳐나와 찬바람 맞을까 근심하여
여인숙엔 온돌 놓아 장작불을 지피자

아랫목에 누룩 띄워 막걸리 담고
항아리 안 낱말들 부글부글 글 읽는 소리 익어갈 즈음
황토방 호롱불 제 먼저 취기 올라
바람벽에 새긴 시경 비틀거리며 읽을 때
문풍지 풍월 읊조리는
집시의 시집 한 채 지었으면


 

 

*시인의 말

나날이 나를 빚는다
오늘 나는 어떤 나를 빚었을까
아니 오늘까지 나는 어떤 나로 빚어져 있을까
일생 물어온 질문

만들어진 나와 스스로 만들어온 나
너는 결코 너의 온도를 잃지 마
내가 쓰는 모든 시는 나의 가면

음표들이 가락을 품고 연주를 기다리듯
한 획의 기호로 가장 긴 말을 나누고 싶었다

나는 내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