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생일선물 - 최세라

마루안 2021. 1. 27. 21:28

 

 

생일선물 - 최세라


달아나라 최대한 빨리
그래도 늦을 거야

너의 목에 소금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달리다 지치면 이걸 핥아
다음 생일엔 사슴 농장을 선물해 줄게

(어려울 거야
뿔이 잘려지고 다시 만나다는 건)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너는 나의 판단의 근원
예감
그리고 이 순간 너는
손이 미끄러지는 문고리
너머의 빈 방
어서 달아나

삼나무 어깨 위 검은 달이 숫돌에 물을 끼얹는 사이
하얀 시내는 검푸르게 휘어진 칼날이 되고
어느새 알게 된 핏빛 비밀처럼 뿔은
베어지고 말겠지만

나는 네가 여기 살았다는 유일한 증거
변론
멈출 수 없는 탄원
그리고 멀리 사라져 가는 너는
이 마을 모두가 뒤를 쫓는 현상수배자

잡히는 순간
다음 번 내 생일이 사라져 버리는


*시집/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시와반시

 

 

 

 

 

 

사라진 궁전 - 최세라

 

 

여기서 보는 폐허는 아름답구나 어쩌다 우리는 무너진 성에 오게 되었을까

 

그래요 웃음이 꽃상추처럼 빠르게 시들어요 끝을 두어 귀해지기로 했었죠 발을 포기하면 발바닥에 딸려온 숱한 길도 떠나보낼 수 있다고 매 정거장마다 내리던 꽃송이 송이 나는 연결되고 싶은 문이어서 경첩을 찾느라 눈을 깜박이지도 못했는데

 

당신은 나를 세워주는 기둥이거나 옭아매는 말뚝이거나

비밀의 침실이거나 휑한 방이거나
훼손이거나 갱신이거나

이번 생은 망쳤고 다음 생은 없죠

웃음이 빠르게 증발해요

오래된 벽돌을 쌓아야 할지 무너진 성의 일부가 되어야 할지

답장을 받지 못한 새와 함께 울어요

 

사라진 궁전이 통째로 별이 되어버린 지점에 서서

 

 

 

 

# 최세라 시인은 1973년 서울 출생으로 2011년 <시와반시>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복화술사의 거리>,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