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무소식은 희소식이 아니다 - 배정숙

마루안 2021. 1. 23. 19:01

 

 

무소식은 희소식이 아니다 - 배정숙
-슬럼프


그 집이 궁금하다
대낮에 벽에 머리를 부딪고 버럭 화를 내며 주인이 다녀간 뒤 몇 달째 어정쩡 비어있는 집
닫힌 문틈으로 평온을 가장한 햇살이 한줄기 비치는 듯 했지만 바람은 이내 흑단 같은 어둠의 머리채를 끌어다 놓고 사라진다

침묵의 부스러기들과 부재의 잔뼈들로 모자이크한 벽
저녁나절 내리던 빗물은 제 발목이 젖도록 귀도 늘려보고 까치발도 서면서 봄의 산도를 눈 빠지게 바라보고 있는데 무중력의 귀가 떠 다닌다

가위바위보로 술래를 정할 수도 그냥 양보할 수도 없이 파랗게 질려가는 입술에 무통주사가 듣지 않는다
쏘아보는 초침소리에 빨려 들어가 발을 빼려야 뺄 수가 없다
잠긴 목소리의 미세한 메아리는 벌써 허공이 먹어치웠다

하여 리트머스 시험지가 색깔이 다르게 반응하지 않는 것이 무덤덤한 맛의 성분 때문이라고 차가운 온도 때문이라고 발효되지 않은 시간 때문이라며 서로를 탓한다

말(言)들의 발길에 차여 다닌 새벽이 기다리는 아침 꽃밥은
혀끝으로 맛보는 착시
배고픈 입을 쓰다듬는 공복의 하루


*시집/ 좁은 골목에서 편견을 학습했다/ 시와표현

 

 

 

 


해피엔딩 - 배정숙


그녀는 오직 주어진 모노드라마에 몸 바친 명배우였다
오늘도 외줄타기 아찔한 무대에서 열연하는 주인공이다

아버지처럼 편안하던 띠동갑 남편을 젓가락장단 치던 목로에서 만났지 지지고 볶으며 굴러다닌 남의 집 곁방살이 설움은 그래도 홑이불처럼 가벼웠다네
철로의 침목처럼 따박따박 고지되는 찢어지는 가난도 무섭지 않았지만 고희 술잔에 쓰러진 영감의 다섯 해는 일으켜 세우지 못하고 있다네

방안을 지키는 한 점의 정물화
식도를 뜨겁게 넘어가는 억척도 쓸모가 없더이다

내게 할당되는 지폐는 오래 자폐증을 앓아 한데바람에 떠는 그믐달처럼 언제나 남의 집 논두렁만 베고 누워 있었지
세상 물결에 밀려가다보니 천지가 개벽이라더니 농공단지 들어온다고 동네가 쑤셔놓은 벌집인거라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는 이년도 빼어들 수 있는 마지막 독침은 있어

배째라 버티어 받아낸 몇 푼 이주비로 하천가 뙈기밭에 고대광실 첫삽 뜨던 날
영감의 딱딱한 목소리 뒤로 돌아누워 진양조로 울었다네

지긋지긋한 인생에 기댄 이 무대는 징치고 막 내리기까지 아직도 먼 데 영감 오년만 더 살아 아니 삼년만 하다가 욕심도 과했지
이제 내 집 구석 구들위에서 우리영감 저 세상 보낼 일만 생각해도 달착지근한데 그려 영감 이만하면 시쳇말로 웰비잉은 물 건너갔다지만 웰다잉은 되지 않을까

 

 

 


# 배정숙 시인은 충남 서산 출생으로 신성대학 복지행정과, 한국방송대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계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나머지 시간의 윤곽>, <좁은 골목에서 편견을 학습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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