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들의 경련 - 김윤배

마루안 2021. 3. 27. 19:56

 

 

꽃들의 경련 - 김윤배


산수유가 노랗게 치정의 말들을 버리고
진달래가 욕정을 못 이겨 질펀하게 누웠다면

꽃들의 경련을 본 것이다

꽃들은 치정과 욕정 사이에
길게는 열흘간의 생애를 던진다

꽃잎 한 장에 달그림자를 그리고 꽃잎 한 장에 비탄을 그리고

뛰어내리는 그곳이
대지거나 강물이거나
낙화의 순간은 숨 막히는 적막이어서

그걸 보았다면 진실에 가깝다
그곳은 어둠의 숲이거나 소신의 꽃불이다

대리석 바닥에 새겨진 명문은 숨겨졌던 연서였다
꽃잎에 새겨져야 거미줄 위로 파경을 옮길 수 있다

한 생애, 꽃잎 뛰어내리는 순간


*시집/ 언약, 아름다웠다/ 현대시학사

 

 

 

 

 


반생 - 김윤배


원망과 냉소로 반생을 가시밭에 두었습니다

원망과 냉소는 목련꽃 짧은 생애에서 크고 깊습니다

가지를 옮겨 앉는 새들이 종일 눈길 주던 목련꽃은
당신이 베데스다로 떠나자 갈색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목련꽃이 기우는 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했던 당신이었습니다
나는 고뇌의 꽃잎을 위해 계절을 건너지 않습니다
목련꽃이 지고 나서 봄을 더 깊이 앓습니다

원망과 냉소는 붉은 달의 심장을 겨냥합니다

달빛에 가려진 생의 안간힘으로 늘 얼굴빛이 붉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상의 달빛이 모두 죽었습니다
비가는 줄줄이, 붉은 얼굴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달빛이 살아날 징후였습니다

당신의 건강한 무릎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당신의 베데스다에는 가지 않겠습니다


 

 

# 김윤배 시인은 1944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한국방송통신대, 고려대 교육대학원 및 인하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겨울 숲에서>, <떠돌이의 노래>, <강 깊은 당신 편지>, <굴욕은 아름답다>, <따뜻한 말 속에 욕망이 숨어 있다>, <슬프도록 비천하고 슬프도록 당당한>, <부론에서 길을 잃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바람의 등을 보았다>,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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