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버지의 꽃 - 이서린

마루안 2021. 3. 28. 19:16

 

 

아버지의 꽃 - 이서린


어시장 왁자한 어물전마다
커다란 고무 통 찬물에 잠긴
다발다발 무수한 주홍빛 돌기

봄이다


어린 딸들은 마루 끝에 앉아 햇볕을 받고 어머닌 수돗가에서 멍게를 손질하였고 맨드라미 꽃씨를 심는 아버지의 손목에 선명한 힘줄 가장의 의지가 꿈틀거렸다 이윽고 작은 술상이 차려지고 아버지는 손을 비볐다 맛있는 것을 앞에 둔 아버지의 버릇, 햇빛에 반짝이는 술잔 알싸한 멍게향이 일요일 오후에 스몄다 딸 셋을 나란히 앉혀 놓고 붉은 낯빛의 아버지는 부드러운 저음으로 선창을 불렀고 음치에 가까운 어머니의 봄날은 간다가 이어졌다 얘들아, 아버진 말이다 봄이 오면 멍게가 단연 좋더라 이 바다 냄새가 참 좋더라 바다에서 피는 꽃 같지 않냐 초장에 찍은 멍게를 먹이려는 아버지와 한사코 싫다는 딸들의 실랑이가 오가는 이른 봄날

선창도 사라지고 봄날도 갔다

오늘은 어시장에서 멍게 한 봉지를 샀다
아버지 생전에 꽃이라 했던
그러니까 입안 가득 봄 바다다


*시집/ 그때 나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파란출판


 

 

 

 

그러나, 꽃 - 이서린


수백 개의 입술이

아니, 가늘고 보드라운 수만 개의 입술이

속살대며 떨리는 촉촉한 키스처럼
가만가만 이마에 하나 둘 닿더니
어느새 발등에 미친 듯이 퍼붓고

제발 좀 보라는 듯
나 여기 있다는 듯 애타는 연분홍 사태
소리 없이 펑펑 쏟아지는 눈물 같은
저 고요한 설움을 차마 어찌 밟고 가나요

작별쯤이야

큰소리치던 날들은 벌써 잊었군요
무성한 기약 뒤엔 조그만 혓바닥이 슬프다는 걸
변하는 건 사랑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걸
연인들은 종종 늦게 깨닫는다지요

도무지 거절하기 힘든 따스한 숨이라면요
덧없는 맹세인 줄 알면서도 피우느라 지우느라
밤새 뒤척이는 격정의 봄밤이라면요

숨 한 번 돌릴 사이 사라지더라도
함성처럼 피다 소나기처럼 끝난다 하여도
사랑은요
벚꽃은요
서러움 뒤에 오는 허무라 해도

그러나, 꽃이잖아요




# 이서린 시인은 경남 마산 출생으로 199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저녁의 내부>, <그때 나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가 있다. 2007년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