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플라스틱 - 조성순

마루안 2021. 3. 26. 22:06

 

 

플라스틱 - 조성순


환타스틱하게
온갖 것들을 담을 수 있는 도구
너무 친숙하여 공기나 물과 같이 되었지.
가볍고 깨지지 않아
이곳 생활을 마치고 은하계로 떠날 때
필수 지참품으로 갖고 가고픈 것
지천으로 흔하여 귀하지 않게 된 것
박을 길러 여물 때까지 기다리거나
불을 때서 옹기를 제작하는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어느 순간
너 없는 세상은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물을 담는 용기로는 제격
둥둥 뜨는 데는 그야말로
플라스틱은 환타스틱
어린 코끼리는 거친 풀잎보다 부드러운 플라스틱을 좋아하지.
고래 배 속에도 들어가고
스스로 진화하여 바닷가 바위에도
껌딱지 모양 붙어 생물인 체도 한다.
거북손 미역 파래와도 영역 다툼을 한다.
금 간 다리도 붙여 주고
상처 입은 내 영혼에도 와서
벌어진 틈을 메워 주어라.
무엇보다 애인과 이별한 내 잠자리에 와서
애인보다 부드러운 네 속살을 보여 주려무나.
너 없이 살 수는 없어.
환타스틱
플라스틱!


*시집/ 왼손을 위하여/ 천년의시작

 

 

 



뒷모습 - 조성순

 
앞모습은 밝더라도 약간은 경직되어 있고
자연스럽게 보여도 카메라를 의식하고 있어
모두 두껍거나 얇은 가면을 쓰고 있다.

눈만 마주치면 환하게 미소 짓는 서양 사람들과 달리
난 웃어도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
오랫동안 험한 표정으로 살아온 사람같이
금 가고 어색한 표정 속에
내 현주소가 있다.

뒷모습은
누구나 쓸쓸한 것
솔직한 내면이
고요한 호수에 비친 산 그림자같이 반영된다.

뒷짐 지고 먼 산 보던 아버지가 이해될 무렵
주변은 조금씩 마른풀 모양 색이 바래진다.

오래 살수록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하는데
누군가 내려준 숙제를 하러
구부정한 어깨로 하오의 길을 가고 있다.

 



# 조성순 시인은 경북 예천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4년 <녹색평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목침>, <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나는 걸었다>, <왼손을 위하여>가 있다. 남성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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