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은 분홍이다 - 이강산
한나절 마늘 꼭지를 따고
깜박, 사람을 못 알아보는 동춘요양원 601호실 정옥연 씨에게 바나나를 까주고
한나절은 옥천산방 꽃밭에서 홀로 지내고
바나나 껍질처럼 물러터지다가
쥐똥나무 열매처럼 까맣게 오므라들다가
이젠 죽음 말고 아무 할 일도 없는 정옥연 씨처럼 휘청휘청 삼청저수지 둑길을 걷다가
어제의 직진은 버리고 우회하다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불현듯 나의 좌표가 궁금해져 삼청제(三淸堤)라 하려다가
가로등 1-546, 하려다가
어젯밤 삐끼 노파 모르게 사진 찍은 수도여인숙으로 하려다가
산방 아래 외딴집 복숭아꽃으로 한다
맨발로 달려드는 분홍으로 한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목련 주사(酒邪) - 이강산
반나절 봄비 마신 목련의 치아가 하얗다
입술 틈새 봄 냄새,
독하다
취기에 다리가 풀려 저녁내 휘청거리는 모양으론 엊그제 꽃집 트럭에 치인 무릎은 다 아물었다는 뜻이려니
그날 분이 덜 풀린 모양이다
제 곁에 소주병 들고 가는 남자의 목덜밀 낚아채는 솜씨라니
그것으로 취하겠느냐,
힐끗대는 눈빛이 하얗다
그런다고 생의 통증이 지워지겠느냐,
하나둘쯤 품고 견디면 아무는 것을
독백마저 새하얀
입술 틈새 봄 냄새,
독하다
# 이강산 시인은 1959년 충남 금산 출생으로 19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 <물속의 발자국>, <모항母港>, <하모니카를 찾아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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