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기어코 그녀 - 정이경

마루안 2021. 4. 8. 22:15

 

 

기어코 그녀 - 정이경
-우물가 자목련 한 그루


대문 밖으로 맴돌던 아버지
비문증이 있었고 이명이 심했다
스스로 유적이 되거나
유폐를 원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일하게 아버지의 난시를 물려받았고 왼손잡이를 이어 가진
길고 긴 겨울 우듬지에 내걸린 나는
분명 다른 이름의 새였다
문고리가 담긴 액자 속에서
문지르고 문질러도 어김없이 제 몸과 이별하는
꽃만 가득했으므로

생의 한쪽 모퉁이가 나간 대문의 경첩 삭아 헐거워지도록 꽃을 피우고 잎을 피워내던 자목련 아래의 마당이 느릿느릿 일어나자 어떤 통곡을 감춘 검은 그루터기가 생겨났다
잠시 다녀간 햇빛들의 간격 사이로 발볼이 좁은 발자국이 고스란히 드러난,

엄마가 엄마를 베고 난 이후의 일이다

그 많은 눈은 언제 어느 우물에 눈 맞추고 있을까


*시집/ 비는 왜 음악이 되지 못하는 걸까/ 걷는사람

 

 

 

 

 

 

작달비 - 정이경


꽃단장이라야
정성 들여 머리 빗어 넘기고
거울 앞에서 매무새 고치는 일이지만
수술도 안 된다는 무릎관절로
복지관 간다나
아무리 곧추세우고 그러쥐어도
살아온 세월만큼 기우뚱해지는 무게 중심,
받쳐 든 검은 우산 아래까지 젖어들고

지난주 배운 동작은 고양이 밥그릇에 두고 나왔나 몰라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던 능소화 낭창낭창한 허리로 웃음꽃 터트린다

물색없이 피고 지던 시절을 기억이나 할까

한 송이, 한 송이

언젠가 잊힐 생의 장면이 펼쳐지는
노인요가교실

틀니를 악물고서라도 바른 동작을 따라 하려 안간힘을 쓰는
칠순 하고도 여든을 훌쩍 넘긴 여자들 등 뒤로
생은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을 기다리나 몰라
작달비 한 차례 신나게 지나가시는 중

 



*시인의 말

눈 닿는 곳곳,
서류더미들 속에서는
오롯이 시인으로만 살 순 없었다
또한
시인도 시인을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내가 만든 나와 함께 갈 것이다
오지에서
오지를 오가는 쉽지 않은,
아직 작동되지 않은 것들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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