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벽 장미 - 김선향

마루안 2021. 4. 27. 21:52

 

 

벽 장미 - 김선향


수원역 옆구리 고등동
청소년출입금지구역 초입
벽에 그려진 장미 한 송이

빳빳한 오만 원권 지폐를 쥐고
서성거리던 사내가 그리기 시작했을까

돈 대신 장미를 찾아
이 골목을 벗어나고픈
광대뼈 불거진 그녀가 그리다 말았을까

손님이 뜸한 장마철

잎사귀도 가시도 없는 벽 장미는
헤실헤실 웃고 있네
주르륵 피눈물을 흘리네

애초에 글러먹은 칠삭둥이처럼
일찌감치 끝장난 폐인처럼

피다 만 장미
그렇다고 지지도 못하는 붉은,

집 잃은 검은 개
황홀한 향기를 맡으려는지
연신 담벼락을 킁킁거리네


*시집/ F등급 영화/ 삶창

 

 

 

 



여신 쿠마리 - 김선향


네팔에는 아직도 살아 있는 여신이 있다지
쿠, 마, 리,

혈통과 가계가 온전한 집안의 어린아이는
수십 가지 조건을 통과해야 한다네
마지막으로 성스러움이 있느냐를 따진다네

겨우 네 살의 나이로 여신으로 받들어진
너는 이제 여덟 살

부모와도 떨어져 쿠마리관(館)에 갇혀
유폐된 삶을 강요받는다
학교도 친구도 모른 채 살아간다

10루피를 지불하고 1분 남짓 너를 본다

화염처럼 붉은 옷을 입은 쿠마리여
불의 신 아그니처럼 이마에 불의 눈을 그린 너는
슬픔도 기쁨도 노여움도 모르는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구나
아흔 살 노파처럼

어쩜 넌 간파했을지도 몰라
초경이 시작되면 곧장 버림받을 네 비참한 운명을

넌 벨리강 건너로 내던져질 거야
추방당한 쿠마리 따위 누구도 거두지 않는단다
북인도 지방을 유령처럼 떠돌다가 창녀로 전락한다더라

쿠마리와 결혼하면 재수가 없고 불행해진다는 미신 때문에
남자들은 하나같이 도망친다지

너는 떠돈다 넝마를 두른 채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너

여신과 창녀 사이에 쿠마리가 있다



 

*시인의 말

 

첫 시집 <여자의 정면> 이후

4년이 흘렀다.

 

뒤집어엎지도

다시 새로워지지도 못했다.

 

그러니

길을 따라 벼랑까지 걸을 수밖에

 

뚜벅뚜벅

소걸음으로 가자.

저녁 어스름엔 울면서도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