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기억에는 라일락이 핀다 - 정선희

마루안 2021. 4. 26. 19:15

 

 

기억에는 라일락이 핀다 - 정선희


꽃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꽃잎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내게
그가 건넨 말이다

캠퍼스를 지날 때마다 라일락 향기가 났다
이상하지, 그가 지나는 어디든 그랬다

바람은 꽃잎을 건드려 향기를 맡는 이라 했다
그의 손동작이 나비처럼 우아해서
내 가슴 위에 내려앉는 나비를 꿈꿨다

속눈썹이 촉촉한 꽃잎 같아
남자 눈이 왜 이리 예뻐요?
차라리 울다가 방금 세수하고 나왔어요,라고 말했더라면
모시나비 날개처럼 섬세한 날개를 꺼내 안아줬을 텐데

손을 잡으면 깜짝 놀라곤 해서
나는 자꾸 장난을 쳤다 뭔가 바뀐 것 같지 않아요?
돌을 치우면 숨을 곳을 찾는 가재처럼
그가 스며든 구석구석 들추며 깔깔거렸다

사귈래요?
여자가 무서워요 사랑 때문에 누나는 수녀원 잠긴 창문이 됐죠
별을 믿지는 않아요 눈물에 맺힌 불빛일 뿐이랍니다

그를 다시 볼 수 없었다
라일락이 필 때면 코끝에 스치는 남자
항상 주머니에 두 손을 잘라 넣었던 그 남자


*시집/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상상인


 

 

 

 

모자이크 - 정선희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이젠 역할을 바꾸어야 할 때

파란 대문이 좋겠어 너는 나가고
나는 들어오면서 눈빛이 마주쳤지
나는 외모에 반하는 그런 여자 아냐

목이 긴 여자가 호리병으로 들어간다 한 줄기 연기가 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
주술 걸린 이의 귀엣말을 신은 믿지 않아
모든 첫사랑이 꽃 필 때마다
건널목 차단기가 아름다운 건
기찻길 때문이야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지만

사랑은 왜 내게 이리 구질구질한 걸까

아련해지다가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
쓰다 남은 색색의 눈빛으로 조각을 이어서 다시 첫사랑을 만든다
한쪽에 쌓아둔 감정의 폐기물 속
버려진 얼굴을 찾아서 재배치한다

상처투성이 발은 검정과 회색으로 덮어두고
꽃 핀 흔적만 조심스럽게 발라낸다

계획대로 되는 조각보란 없지
퍼즐처럼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일 뿐

아직 첫사랑은 완성되지 않았어